사건과 경험
글쓰기는 ‘현실을 베어 무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먹어치울 것인가? 달리 말해,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우리는 양옥순 씨와 같은 천재가 아니므로, 이런 고민도 해볼 만하다. 수업 시간에 글을 못 쓰는 학생들을 보면, 쓰고 지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지우려고 쓰는 건지, 쓰려고 지우는 건지 헷갈린다. 처음부터 완벽하고, 훌륭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이다.
많은 글쓰기 책이 마음 가는 대로 쓰라거나, 생각하지 말고 그냥 쓰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문법을 무시하고 쓰라고도 한다. 무엇인가를 써보기 전까지는 뭘 말하고 싶은지 불분명할 때가 많으므로, ‘일단 쓰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아무 생각 없이 무엇인가 토해내듯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쩌면, 이미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이 그런 방식으로 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들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글쓰기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맨땅에 헤딩하라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김연아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전 아무 생각 없이 점프해요.” 뭘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일단 쓰라니. “뭘 먹어야 해요?”라는 질문에 “일단 아무거나 처먹어”라고 답하는 꼴이다.
초고는 부담 없이 쓰는 게 좋지만, 아무 규칙도 필요 없다는 식의 설명은 왠지 과장처럼 느껴진다. 나도 글쓰기 책의 조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초고를 써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잘 안 되었다. 애초에 생각 없이 글을 쓴다는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비록, 내게는 쓸모없는 조언이긴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독자들은 여기서 읽기를 멈추고, 지금 당장 아무 생각 없이 무엇인가를 써보기 바란다. 자신도 모르던 글쓰기 재능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기 어렵다면, 앞으로 설명할 간단한 규칙들을 활용해보자.
첫 문장 쓰기는 글쓰기에 능숙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공들여 쓴 첫 문장이라도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기껏 써놓은 문장을 무자비하게 학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첫 문장으로 마음을 사로잡아라!”는 따위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도 된다. 우리는 광고 문구를 쓰려는 게 아니다. 한 번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첫 문장을 궁리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그날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었다. 먼저 엄마와 할멈. 다음으로 남자를 말리러 온 대학생, 그 후에는 구세군 행진의 선두에 섰던 50대 아저씨 둘과 경찰 한 명이었다. 그리고 끝으로는, 그 남자 자신이었다.
손원평의 소설 『아몬드』 도입부다. 첫 문장부터 독자를 사로잡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한 명이 다치고 여섯 명이 죽은 참사가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이 엄마와 할멈이다. 독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할 것이다. 작가는 첫 문장을 언제 썼을까? 작품을 시작할 때였을까 아니면 작품을 마무리할 때였을까? 오직 작가만 알겠지만, 나는 첫 문장을 마지막에 결정했다는 쪽에 손목까지는 아니더라도 500원 정도는 걸 수 있다. 작가는 작품이 어느 정도 완성된 후에도 첫 문장을 두고 계속 고심했을 것이고, 이렇게 저렇게 고치고 다듬은 후에야 독자에게 내놓을 첫 문장을 결정했을 것이다.
영감 어린 첫 문장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글을 쓰다 보면 첫 문장은 계속 바뀐다. 특히 엉성한 초고로 시작한 글은 그렇다. 첫 문장은 글의 첫인상을 결정하므로 작가는 마지막까지 첫 문장을 붙들고 고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초고를 작성할 때는 첫 문장이 뭐가 되든 상관없다.
이렇게 말해도, 독자들은 분명히 “그러니까,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하라는 건가요?”라고 물을 것이다. 어떤 문장으로 시작할지 막막할 때, 언제나 성공하는 방법이 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듯, 이 문장을 쓰기만 하면 계속해서 글을 써나갈 수 있다. 일단 연습장에 다음과 같이 써 보자.
아무리 평범한 문장이라도 글로 쓰면 힘이 생긴다. 문장은 생각을 유도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쓰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지?’라고 묻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은 경험과 기억을 소환하는 짧은 주문(呪文)이며, 무엇을 베어 물지를 결정하는 주문(注文)이다.
글쓰기 소재는 경험에서 나온다. 글쓰기를 하려면, 먼저 ‘무슨 일이 있었지?’라고 물을 수밖에 없고,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운을 떼면 글쓰기가 시작된다. 특별하고, 충격적인 일을 떠올리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우리 삶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글쓰기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기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
일본의 하이쿠 작가, 바쇼의 글이다. 그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꽃을 우연히 발견한 일을 기록했다. 나라면, 울타리 밑은 쳐다보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거기서 냉이꽃을 발견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바쇼는 그 사소한 일에서 무엇인가를 배웠다.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에 감탄했을 수도 있고, 자신의 부주의함을 반성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성찰은 평범한 현실을 베어 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삶에도 충분히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분명 무슨 일이든 떠오를 것이다. 바쇼의 표현을 빌려보자. “가만히 살펴보니, 많은 일이 일어났네, 등잔 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