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어느 날, 유치원에 다니던 딸이 아빠는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마법사”
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무슨 마법?”
나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좋은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작가들은 모두 “Movere animo!(마음을 움직여라!)”라는 주문이 통하길 바란다. 마법이 통한다면 무지와 편견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직 소수의 대마법사들만이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궁극의 마법을 펼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사람들은 글쓰기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글쓰기 책을 찾는다. 내 경우는 직업 때문에 글쓰기 책을 읽었다.
나는 13년 차 논술 강사다. 그간 나는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숱한 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쳤다. 사람들은 논술 강사라고 하면,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배경지식을 외우게 하거나 판에 박힌 답안을 쓰게 만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든 말든, 내 관심은 오직 학생들이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글쓰기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글쓰기를 도와줄 좋은 책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진한 기대였다. 글쓰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걸 안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이 많은 규칙을 언제 익히지?”, “이런 규칙을 언제 사용해야 한다는 거야?”라는 질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날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써야 한다” 거나 “고치려 하지 말고 무작정 써야 한다” 는 등의 충고는 지금 당장 글쓰기 능력을 향상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적용하기 어려웠다.
결국 어떤 글쓰기 책도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럴듯한 제목과 목차와 홍보 문구로 독자를 유혹하는 대부분의 글쓰기 책들은 하나같이 ‘그럴듯한’ 소리만 반복했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 머리말에 “글쓰기에 대한 책에는 대개 헛소리가 가득하다”라고 썼는데 아마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짐작한다.
글쓰기에 관한 대표적인 헛소리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누군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예습과 복습을 열심히 해야지요.”라고 답한다면, 우리는 무릎을 치며 “그렇군요. 역시 대단합니다.”라고 말해야 할까? ‘살려면 숨 쉬어야 한다’는 수준의 조언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내가 싫어하는 글쓰기에 관한 또 다른 헛소리는 ‘마음으로 쓰고, 머리로 고쳐라’다. 이 말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포레스터가 글쓰기 재능을 보이는 소년 자말에게 한 것이다. 이 역시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고쳐라’는 수준의 조언인데, 차라리 ‘시상하부로 쓰고, 전두엽으로 고쳐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글쓰기를 신비화하는 ‘조언인 듯, 조언 아닌 조언 같은 헛소리’는 셀 수 없이 많다. 서점에 가서 글쓰기에 관한 아무 책이나 펼쳐보면 글쓰기에 관한 책인지 종교 서적인지 모를 문장들이 가득하다. 이런 책들은 글쓰기를 신비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쓰기를 숭배하게 만든다. 구원을 얻고 싶으면 기도를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선행을 해야지 왜 글을 쓰라고 하는가.
글쓰기를 신비화하는 책들의 정반대 쪽에는 글쓰기를 세속화하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표지만 봐도 금방 구별할 수 있는데, ‘글쓰기를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자기계발서다.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을 원한다면 글쓰기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면 안 된다. 글쓰기는 시간이 남아도는 ‘루저(looser)’들의 취미다. 세속적인 성공을 바라는 이들에게 루저(looser)는 곧 루저(loser)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글쓰기를 하고 앉았겠는가.
이 책은 글쓰기를 신비화하지도 않고, 세속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글쓰기가 인생을 바꾼다거나, 글쓰기가 경쟁력이라거나, 글쓰기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식의 허무맹랑하고 천박한 이야기는 없다. ‘글쓰기를 할 때 꼭 지켜야 할 OO가지 규칙’ 따위를 아무 맥락 없이 나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따져가며 문장을 고치는 세부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이미 그런 책은 아주 많고, 앞으로도 쉬지 않고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 이제부터 철학이 할 일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지금까지 글쓰기 책은 글쓰기를 해석하는 데 그쳤다. 이제부터 글쓰기 책이 할 일은 글쓰기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양옥순 호강하네
평생글몰라도잘살라따
그런대이장이공부하라니시발
ㅁ-미음이외이리안도ㅑ시브랄거.
……
양옥순내이름쓸수이따
나혼자전화하니
아들이깜짝놀란다
공부를하니자식들도조하합니다
욕안한다고조하합니다
한글을 처음 깨우친 양옥순 씨가 쓴 ‘양옥순 호강하네’라는 글이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파괴하고, 과감한 줄임과 욕설을 섞어 전위적인 느낌마저 들지만, 감동적이다. 마음이 움직인다. 늦게 시작한 공부가 잘 안 되는 답답함과 그런데도 자식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흡족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을 보여주면, 대부분 재밌다거나, 감동적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글쓰기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본다면 양옥순 씨의 글은 하나의 미스터리이자 해명해야 할 신비로운 현상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미스터리, 즉 문장을 이용하여 온전한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신비한 현상을 해명하고, 독자들이 실제로 그런 글을 쓰게 만들 것이다.
만약, 내가 독자들에게 “짧게 한 문장을 쓰세요. 그리고 거침없이 계속 쓰세요”라고 말한다면, 대부분 “한 문장도 못 쓰겠어요” 혹은 “어떻게든 한 문장은 쓰겠지만, 거침없이 계속은 못 쓰겠어요”라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안다. 거침없이 쓸 수 있는 독자가 뭣 하러 이런 책으로 시간 낭비를 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양옥순 씨는 그 일을 해냈다. 그녀는 어떻게 저런 거침없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녀는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였을까?
‘양옥순 미스터리’의 진실은 이렇다. 인간은 누구나 문장을 만들고 연결하는 능력을 타고난다. 양옥순 씨를 보라. 그녀는 맞춤법에 맞는 문장을 쓸 줄 몰랐고, 심지어는 ‘ㅁ’자 조차 정확히 쓸 줄 몰라 ‘시브랄’이라 욕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문장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거침없이 연결하고 있다. 이 능력은 양옥순 씨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보편적인 능력이다.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 자체는 배우는 게 아니라 타고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계발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다. 양옥순 씨를 보라. 그녀는 이제야 글쓰기 능력을 계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당분간은 저런 식으로밖에 쓸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글쓰기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면, 분명 더 나은 글을 쓰고 싶을 것이고, 더 나은 글을 쓰는 방법을 알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철자나 맞춤법이 아니라 자기가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브랄’이라고 욕할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양옥순 씨 못지않은 능력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양옥순 씨처럼 ‘ㅁ’자를 쓰지 못해 욕할 정도로 국문법의 기초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독자들이 양옥순 씨보다는 훨씬 많은 글을 읽고, 써 왔으며, 앞으로도 글쓰기 능력을 향상하겠다는 의지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독자들이 양옥순 씨 못지않은 글을 쓰도록 도울 수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소설은) 거울이 아니라 위장(胃腸)’이라고 썼다. 소설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하는 게 아니라 소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소설을 비롯한 모든 글쓰기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위장만으로는 소화할 수 없다. 대장도 있어야 하고 소장도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하게 소화만으로는 안 된다. 소화만 하고 못 싸면 장폐색으로 죽는다. 소화가 끝났다면 괄약근에 힘을 주어 싸야 한다.
모든 글쓰기는 현실을 베어 물고, 소화하여, 배설하는 세 단계로 구성된다. 이 책은 이 과정을 도울 것이다. 일종의 소화제이자, 변비약인 셈이다. 우리는 앞으로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기록하고(현실을 베어 물고), 그 속에서 좋은 질문을 발굴하여(소화하여), 그에 관한 견해를 다른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쓰는(배설하는)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내 딴에는 글쓰기 경험이 부족한 독자를 위해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 딸과 유치원도 다니지 않는 둘째 딸도 언젠가는 이 책으로 글쓰기를 배울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하나만 당부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자기 손으로 한 문장씩 써가는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글쓰기 책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자신의 글쓰기 재능을 믿고, 꾸역꾸역 쓰라. 당신은 이미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재능을 발견하고, 꾸준히 연습하면 당신도 양옥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잘 안 된다면, 속 편히 글쓰기를 포기하라.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잃을 것도 없지만, 한다고 해서 크게 얻을 것도 없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다른 취미를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실패할 운명이므로, 인생의 실패 목록에 글쓰기를 추가하더라도 그리 부끄러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실패를 하려면 일단 시도부터 해야 할 테니, 이 책을 마지막 시도로 생각하고, 열심히 시도하고 실패하길 바란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동료 강사들의 조언과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책 전체의 구조를 꼼꼼히 살펴 조언해 준 이명기 선생님에게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그간 놀라운 글들로 나를 자극하고 영감을 불러일으켜 준 다수의 수강생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행복하길 빈다.
2019년 3월 대치동에서.
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