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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Aug 23. 2017

자신의 비밀에서 보물을 발견하세요

보편과 개별

우리가 어떤 사건을 글로 기록하고, 그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이유는 공감을 얻고 싶어서다. 모든 글은 독자에게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당신도 똑같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속삭인다. 이 속삭임에 독자가 반응할 때, 즉 마음이 움직일 때 좋은 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개별 경험과 사건 안에 보편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한 편의 글을 단팥빵에 비유하자면, 개별 경험이나 사건은 단팥빵의 외피이고, 보편성은 단팥이다. 단팥빵을 먹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단팥의 달콤함이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보편성이 개별성보다 중요하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보편성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형상화되어야 한다. 사랑과 우정, 부와 명예, 질투와 배신, 삶과 죽음, 부조리와 정의 등의 보편성 목록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글이 될 수는 없다. 보편적 가치들은 반드시 개별적 사건과 상황 속에서 구체화해야 한다. 보편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성공한 글은 보편적인 가치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보편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


나는 CT 정밀검사 결과를 휙휙 넘겼다. 진단은 명확했다. 무수한 종양이 폐를 덮고 있었다. 척추는 변형되었고, 간엽 전체가 없어졌다. 암이 넓게 전이되어 있었다. 나는 신경외과 레지던트로서 마지막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난 6년 동안 이런 정밀검사 결과를 수없이 검토했다. 혹시나 환자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지만 이번 검사 결과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


폴 칼라나티의 『숨결이 바람될 때』의 도입부다. 일류 대학으로부터 교수 자리 제안을 받으며, 전도유망한 레지던트 마지막 해를 보내던 저자는 어느 날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그 후 2년여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5년 3월 세상을 떠난다.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드라마 내용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윗글에서 저자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병이 진행된 상태를 담담하게 기록한다. 암을 치료하던 의사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저자가 늘 죽음을 다루는 의사라는 특수한 상황이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저자가 의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진은 내 것이었다’라는 문장에서 ‘그 사진은 누구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공감한다. 독자들은 윗글에서 죽음의 의외성과 필연성과 더불어 삶의 아이러니를 깨닫는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삶은 소중하다’는 문장은 얼마나 진부한가. 이와 달리, 암에 걸린 자신의 CT 결과를 확인하는 저자의 담담한 진술은 죽음과 삶에 관해 직접 말하지 않지만, 죽음에 관한 모든 진술은 사실 삶에 관한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자기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 … 중략 … )


자신의 비밀을 쓰라.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일들. 그것이 우리가 먹어치워야 하는 현실의 마지막 조각이다. 어쩌면 모든 글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절대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일을 대면하고, 그것을 먹어치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들기 전, 허공에 발길질하게 만드는 그 일에 관해서 써보자. 꿈에서라도 다시 나올까 봐 두려운 그 일에 관해서 써보자. 자신의 쪼잔함, 더러움, 콤플렉스, 비열함, 사악함에 관해, 자신의 흑역사를 기술하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게 해줄 것이다. 비밀은 나만의 것이므로 개별적이고 사적이지만, 그 사건이 비밀로 남아야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보편적인 것이 담겨 있다. 


그러나 자신의 비밀에 관한 글은 내면이 강한 사람만이 쓸 수 있다. 비밀을 대면하고,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힘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 쓰려다 여러 번 포기했고, 아직도 그 일에 관한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빼놓고는 ‘나’라는 인간을 설명할 수 없어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은 때론 악령을 소환하는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독자들이 이런 극약 처방을 쓰지 않더라도, 쓸 만한 일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라지만, 언젠가는 이 극약 처방을 한 번 사용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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