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문법
많은 글쓰기 책들은 독자들이 한 문장 정도는 우습게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한 문장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독자가 의욕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써 놓고, 눈만 껌뻑이고 있을 것이다. 한 문장도 못 쓰는 사람에게 글쓰기 방법을 설명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가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 될 상황이라도 걱정하지 말자.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있다. 시동을 걸 수만 있다면 첫 문장은 뭐든 상관없다.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조건 ‘나는 무엇을 어찌했다’의 구조로 된 한 문장을 써보자.
( 이런 일이 있었다. )
나는 퇴근길에 길고양이를 보았다.
나는 ‘넌 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니?’라는 충고를 들었다.
나는 며칠 전, 유학을 떠나는 후배를 만났다.
나는 오랫동안 벼르던 펠리컨 M800을 샀다.
‘우주의 기원’이나 ‘인공지능의 미래’에 관해 쓰긴 어렵지만, 점심으로 먹었던 쌀국수나 어젯밤에 꾸었던 꿈에 관해서라면 뭐든 쓸 수 있다. 이런 글의 주어는 당연히 ‘나’가 되고, 서술어는 ‘나’의 경험을 드러낸다(보았다, 들었다, 만났다, 샀다).
첫 문장이 뭐가 되든 상관없다면, 주어 역시 ‘나’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관한 글을 쓰려면 주어만 바꿔주면 된다.
( 이런 일이 있었다. )
아내는 출산 때문에,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구의역에서 20대 청년이 열차에 치어 숨졌다
첫째가 내게 생일 축하 카드를 주었다.
실제 사건이 아니라 가짜 사건을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다.
( 이런 일이 있었다. )
영화 『겨울왕국』에서, 한스 왕자는 안나를 배신한다.
소설『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한다.
소설『어스시의 마법사』에서, 게드는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다.
주어를 먼저 쓰라고 하면, 어떤 이들은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뭔가 더 대단한 글쓰기 원칙을 알려달라고 한다. 혹시, 그런 생각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썼던 글 중 하나를 택해서 각 문장의 주어에 표시해보라. 주어를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장담하건대, 주어부터 결정하라는 원칙의 중요함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글을 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