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입사
지선의 첫 출근 날, 지수는 20명의 조직원들에게 지선을 인사시켰다. 지선은 지수 외에 19명이 되는 인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예쁘다, 잘하고 계시다고 들었다를 연발했다. 인사를 마친 후에 지수는 수진과 은진을 불러 지선과 차 한잔을 했다.
- 지수; 전에 말한 것처럼 오늘 부터 마케팅 총괄로 오신 황지선 상무님을 소개할게요. 상무님, 이 쪽은 패션 MD 팀의 수진 팀장이구요, 이 쪽은 온라인 디자인 팀의 은진 팀장이예요.
- 지선; 안녕하세요, 와, 정말 조직이 젊네요. 너무 어리고 예쁘시다.
- 지수;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았다.) 온라인 디자인 팀에서는 화장품 사업도 맡고 있어요. 아직 업무 분장이 정확하게는 되지 않았는데, 첫 RUSH BRUSH 컬렉션은 은진 팀장이 거의 실무자 급처럼 도 맡아서 해주셨어요. 안 해본 거라서 기획 상품처럼 최소 수량만 발주했는데, 생각보다 잘 나가서 후회했어요. 이제 제대로 해보려구요. 아직까지는 제품 종류를 엄청 많이 낼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은진 팀장님과 밑에 디자이너 분들이 협력해서 해주고 계세요. 임원이라는 표현도 뭐하지만, 앞으로 회사 경영진은 우리 넷이 되면 될 것 같아요. 패션 기획은 계속 수진 팀장님이, 웹 및 뷰티 쪽 기획은 계속 은진 팀장님이, 홍보 및 경영 지원팀은 황상무님께서 총괄해서 봐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수진과 은진팀장님은 상무님께 보고 라인은 아니지만 앞으로 같이 봐주셨으면 해요.
지수는 R&R이나 보고 라인을 확실하게 하지 않고 '같이 봐주면 좋겠다'라는 말이 갖는 위력에 대해 알지 못했다. 회사 생활을 해보지 않고 조직 생활에 대한 노하우가 적은 그녀의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 은진;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회사 자체가 패션으로 시작해서, 황상무님의 조언이 앞으로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지선; 당근이죠, 어떤 부분이 답답하실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요.
- 수진; 패션도 마찬 가지예요. 옷은 지수 대표님이랑 같이 잘 만들고 있는데 홍보할 방법이나 이런 것들이 아직은 많이 부족해요.
- 지선; 패션은 뷰티에서만큼 홍보나 마케팅이 발달하진 못했어요. 걔네 뭐 인스타에 인플루언서들이 입고 나와서 카페나 리조트에서 사진찍고 이런거잖아. 럭셔리 비즈니스 MBA 공부할 때도 뷰티 사례 케이스 스터디를 많이 공부하죠. 패션 쪽은 오히려 심플해요. 리테일러도 그렇고. 그건 진짜 감인 것 같아, 감. 일단 옷을 잘 만들어야지. 근데 여태까지 브러시는 너무 유행에 맞춰서 잘 해주고 계셨으니까. (웃음) 제가 파리에 있을 때, 발망 같은 브랜드들의 케이스를 좀 검토해보고 스터디한 게 있어요. 패션이 처음엔 생소했는데, 까놓고 보니까 뷰티랑 다를게 없더라구요. 매출 분석하고 경쟁사 분석해서 유행에 따르되 인하우스 헤리티지를 살리고 이런거가. 내 머리 속에 다 있으니까 완전 나만 믿고 맏겨.
- 지수; 저희가 사실은 상무님께 기대고 싶은 부분 중 하나가 글로벌 프로젝트거든요. 요즘 경쟁사 사례들을 봐도 중국이나..
- 지선; 사실 죽어가는 아멜리에 브랜드를 한국에서 제가 다시 띄운 걸 보고 본사에서도 아시아에서 다시 리-런치를 검토해라 라고 한거거든요. 무슨 비즈니스 앰버서더처럼 중국이나 일본 홍콩 같은 주요 국가에 내 베스트 프랙티스 사례 전파하러 다닌게 일이었어요. 그 때 APAC 디렉터는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죠. 나참. 회사가 그래요. 그 디렉터 월급을 날 주던가. 일만 더 주는데 또 그 때는 그게 좋은건줄 알고 열심히 했다? 하하. 웃기죠?
- 지수; 네, 무튼 다른 나라 바이어들이 슬슬 입소문을 탔는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해외 채널이나 계약 조건 같은 것들이 저희끼리 보고 판단하기가 좀 어려운 게 있었어요. 상무님이 경영과 마케팅을 총괄하면서 해외 쪽 비즈니스도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 지선;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아휴, 난 일복은 타고 났어. 여기서도 보니까 내 미래가 보이네, 보여.
첫 미팅 후에 지선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보였다. 자신감에 차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지수도 마음을 놓았다. 저 정도 인재가 도와주면 우리 회사의 뷰티가 성공적으로 한국 시장에 안착되고 더 나아가 글로벌화 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 네 명이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은진은 지선을 잡고 말했다.
- 상무님, 저희 이번 목요일 오후에 코스모인터에서 다음 시즌 출시 샘플을 가져 오기로 했거든요. 같이 미팅에 참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어머, 오자마자 상기(상품 기획) 회의네? 내 새끼 만드는 것만큼 재밌는 게 어딨겠어요? 알겠어요. 근데 내가 어떤 상품이 나올지를 전혀 모른데 어떡하지? 뭘 알아야 인풋을 줄텐데.
- 일단 뷰티는 립브러시 6종 기획으로 출시해서 완판한게 다인데요, 그 후에 다음 시즌부터는 시즌 컬렉션으로 출시한 후에 완전히 연간 운영 제품은 내년 하반기나 내후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 아, 그럼 지금 전략부터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죠? 마케팅이 그냥 광고만 하고 그러는 게 아니고 상품 기획부터 제대로 봐야 되거든요. 알겠어요. 그럼 미팅 전에 여태까지 진행된 거 미팅 진행 하시죠.
은진은 이렇게 일 해본적이 없어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랐다. 화장품을 해보자고 해서 꾸역 꾸역 개발해서 출시한 뒤 완판한 게 전부였다. 자신의 팀원들도 브러시의 뷰티 사업에 대한 전략은 없었고 막연하게 다음번에는 글로벌 메이크업 브랜드가 하는 시즌 컬렉션 상품처럼 출시해보자는게 생각의 전부였다. 대충 섀도우와 블러시, 립 제품 정도면 되지 않을까 했다. 은진과 팀원들이 한 회의에서는 립을 낼 때, 기존에 냈었던 6가지 컬러에서 확연히 잘 팔렸던 3가지 컬러를 재출시하면서 5가지 컬러를 추가 출시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보통 립 제품은 요즘 8가지 컬러는 나온다는 막내의 인풋도 근거가 되었다. 그 정도가 은진의 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전략의 전부였다. 지수 대표도 매우 전략적이라며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 은진은 이런 이야기를 가서 하면 되겠지하고 다음 날 오전 미팅을 잡았다.
그 무렵에 수진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오래 사귀진 않았지만 이런 남자를 지금 놓치면 다시는 못 잡을 것만 같았다. 함께 화보를 촬영하던 포토그래퍼 준협이였다. 은진이 웹디자인과 포토를 같이 하다가 더 전문적인 포토와 작업해보자고 해서 뚫은 첫번째 외주 프리랜서 포토그래퍼였다. 준협은 과하진 않았지만 적당히 패셔너블했다. 말도 많지 않은데 필요한 말은 적재적소에 했다. 어떻게 보면 갑을 관계 먹이 사슬에서 을이었지만 수진에게 그렇게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광고주를 거슬리게 하는 선을 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 화보를 찍던 5월 초 어느 날에 유난히 햇빛이 강했던 날에 수진은 그에게 마음을 뺏겼다. 준협은 리넨 소재 반팔에 베이지색 발목 바지를 입었다. 재개발 대상 지역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주택가 단지길에서 화보를 촬영했다. 빈티지한 감성을 살리고 싶어서 고른 그 장소는 하필 언덕이 많았다. 삼각대도 놓기가 쉽지 않아서 준협이 자세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며 찍어야 했다. 계속 되는 장비 운반과 더운 날씨 때문에 리넨 소재의 티가 가슴과 겨드랑이가 흠뻑 젖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그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원래 남자는 자기 일에 집중할 때 제일 멋있다고 했던가. 자기는 다른 조건은 안 봐도 잔근육 있는 남자가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수진이었다. 준협은 경도 비만으로 몸이 퉁퉁한 편이었다. 남들 눈에는 그냥 살찐 상체도 그 날 따라 수진의 눈에는 다부진 어깨로 보였다. 여성들이 많은 환경에서 늘 습관처럼 무거운 장비들을 직접 챙기던 그의 모습도 그냥 할일을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뭔가 자상하게 느껴졌다. 그 날 밤 수진은 준협에게 벌써 세번째 촬영인데 뒷풀이를 제안했다. 지수와 자신의 직원 한 명과 같이 넷이 조촐하게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마셨다. 그 후 더 자주 그와 일했고 따로 또 같이 어울리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티 안나게 열심히 들이댄 결과로 연인 사이가 되었다.
연인 간판을 달자마자 지수와 은진에게 고백했다. 둘은 진심으로 수진의 연애를 축복해줬다. 지수는 직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니 우선 당장은 밝히지 말자고 했고 수진도 별 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회사에는 결혼을 확정한 후에나 고백했다. 비밀 연애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괜히 같은 동료들에게 민망하기도 했거니와 아직 초기 단계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미루고 미뤘던 것이 일이 그리 된 것이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수진은 이래서 워라밸이 중요하구나 생각했다. 상견례부터 식장과 스드메까지 어찌나 신경 쓸 일이 많은지. 더구나 자기는 일단 자취하던 준협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로 했기에 망정이지 집까지 알아봤으면 정말 힘들어서 결혼 포기했겠다 생각했다. 최근에는 신혼 여행지를 알아 보느라 사실 회사에서도 잠깐 잠깐 짬만 나면 여행사에서 항공 및 숙박 견적을 받아 보고 비교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 온 황상무를 그렇게 많이 신경 쓰지는 못했다. 은진은 오자마자 그녀와 미팅을 잡고 있다는 걸 알긴 했다. 그건 은진이 맡은 사업이 신규 사업인데다가 황상무 전문 분야인 뷰티 쪽이라서 당연한거라고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