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철단골 Oct 23. 2019

별일 없는 날도 별일 있는 것처럼

허지웅 나혼자산다

허지웅 작가가 일종의 혈액암을 이겨내고 돌아 왔다. 컴백은 나혼자산다에서 알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게 되었다. 좀 상투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보고 예전처럼 뾰족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방송컨셉상이었을지 몰라도 그 전까지는 무성욕자라고 하던 그가 결혼도 하고 싶고 무려 애도 낳아보고 싶다고 했다. 암에서 살아나면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면서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느끼고 나서 무언가 깨달음이 있긴 한 모양이다. 인스타에 그에게 DM을 보내는 투병 중인 사람에게 답변하는 장면도 방송에 나왔다. 어떤 심정에서 결혼도 하고 싶고 자녀도 갖고 싶어지게 되었는지 물었지만 아직 답은 듣지 못했다. 투병 중인 사람들의 더 절박한 DM에 답을 해주느라 내 것까지는 답할 시간이 없었으리라.


그가 방송에서 한 말 중 많은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항암제는 너무 강한 독성이 있어서 밤에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아프다고 했다. 뭐만 먹으면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아서 토하는게 두려워서 안 먹게 된다고도 했다. 그런데 토하더라도 먹어야 기운이 나므로 계속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 긴 투병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도 인상 깊었다. 나은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나도 의사 말만 잘 들으면 낫는 거겠지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위안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혼자 사는 것이 제일 낫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용기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고 한다.


나혼자산다 영상에서는 내내 그가 얼마나 편안하게 그냥 하루를 보내는지 평범한 일상을 비춰준다. 음식을 시켜 먹고 요가를 하고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 대고 자신이 아끼는 피규어를 청소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조바심이 났는데 지금은 너무 좋다는 그에게서 새삼 여유가 느껴졌다.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면 조바심이 난다는 말도 크게 공감이 됐다. 하루에 자기 계발이든 영화를 보든 재미있는 티비를 보든 글을 쓰든 뭔가 내 하루에 당위성을 주는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기분이 찝찝했다. 최근에 독한 감기가 2주 넘게 지속 되어서 계속 의미 없이 골골 대다 잠들기 일쑤였는데 그 때마다 안 아팠다면 뭐라도 했을텐데라고 생각했다. 아픈 내 몸보다 그냥 의미 없이 하루를 보냈다는 죄책감이 더 컸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런 별일 없는 하루가 얼마나 큰 기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당연한 것인줄 알았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진부하지만 이런 경험을 거친 사람이 하면 더 힘이 실어지는 이야기를 해줬다. 많은 사람들이 별일 없었던 하루도 별일 있었던 것처럼 (감사하며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는 그의 끝 멘트는 진심이 묻어났다.


어제는 회사에서 대휴를 받아 쉬는 날이었다. 평일날 아무일 없이 괜히 휴가를 내는 것은 또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출근 복장으로 지쳐 보이는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괜히 더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고 어딜 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도대체 내가 매일 밥벌이를 하기 위해 영혼을 팔 동안 이렇게 놀고 먹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어제는 허지웅의 영상을 본 후인데 마침 또 암에 걸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를 봤다. 이 영화에서도 하루 하루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팝콘과 헛개수차를 들고 극장에 입장하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평일 낮인데 마침 히트친 영화도 아니라서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6명 정도 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자랑질 하려고 팝콘 사진을 찍었다. 이게 방정이었다. 사진을 찍고 휴대폰을 내려 놓는 순간 툭! 하는 소리가 났다.

팝콘을 모두 쏟았다. 5천원이 그냥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갔다. 세 가지 생각이 연달아 들었다. 돈 버렸다. 반 정도 남았을 줄 알았는데 어쩜 한 톨도 안 남기고 다 쏟아졌냐. 이것도 재밌네. 평일 저녁이거나 주말이었으면 기분이 안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평일 낮이라 이것도 그냥 웃겼다. 회사를 안 간다는 게 주는 행복감은 매우 풍성하고 단단했다. 팝콘 따위가 망칠 기분이 아니었다.


앞자리 커플이 잠시 뒤를 봐서 부끄러웠다. 쟤 혼자 영화 보러 와서 팝콘 굳이 먹더니 다 쏟았네 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어니언 팝콘이라 팝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결국 평일이라서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인 한가운데 자리에서 영화 보기는 포기했다. 왼쪽 끝으로 이동해서 영화를 봤다.


오늘이 허지웅 작가가 말한 그런 날이었다. 별일 없지만 별일 있는 것처럼 행복했던 하루. 아, 이 놈의 밥벌이가 힘들긴 한가보다. 밥벌이 안 해도 되는 날의 나는 아주 둥글 둥글하고 긍정적이었다.


그나저나 허지웅 작가가 인스타 DM을 언젠가는 답변을 해주면 좋겠다. 읽음 표시는 뜬 것 같던데.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이름은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