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커피 : 독립 마케팅 스튜디오의 넋두리 다이어리 4
화요일에 이발을 하려고 한달 전에 잡은 예약을 오늘 취소했다. 최근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잦았다. 몇년간 같이 글을 써왔던 연지님과의 점심 약속도 취소했고, 친구들의 저녁 약속은 아직 제대로 답변도 못했다. (나는 보통 날짜부터 잡는 편이었다.) 몇 번이나 꼭 가야지 가야지 했던 독서 모임도 결국 참여하지 못했고, 가고 싶었던 전시는 인스타그램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최근에 책은 펼치지도 못했고 이북 리더기는 배터리가 방전된 채 가방에 들어있었다. 심지어 음악도 거의 안들었다. 영화… 두시간 동안 시간을 비우는 일이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정말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실제로 약속을 취소하면서 변명처럼 이야기했다. 제가 진짜 웬만해선 이러지 않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나는 왜 자꾸만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변명하며 사과로 일관하고 있는 걸까.
사실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삶’을 산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한 길어봤자 7년? 라인프렌즈를 다니기 전, 대행사 생활을 했을 때는 사실 지금처럼 살았다. 개인적인 약속은 당연히 잡을 수 없었고 휴가도 마음대로 써본 적 없었다. 주말에 나가는 건 당연했고, 이십시간 넘게 촬영장에 있다가 새벽에 퇴근해도 샤워만 하고 아홉시에 다시 출근하기도 했다. 당시엔 그게 가혹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왜냐면 실제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사람들끼린 좋았다. 힘들지만 똘똘 뭉치는 느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를 돕는 감각, 그런 걸 느끼긴 했다. 물론 그 안에서 곪고 있는 개인의 건강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하고 있었지만.
그러다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다.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고, 개인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나갈 때 느낄 수 있는 만족감과 주체적인 느낌에 대해서. 그렇게 처음으로 개인으로서, 하고 싶은 것을 해보고 약속을 잡고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을 쓰며 쌓아가는 뿌듯함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쪽에 더 집중했던 거 같다. 나를 지키는 일, 내가 중심이 되어 의지를 관철하며 나의 시간을 리드하는 일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이끌어야 하는 것은 나의 삶이 아니라, 나의 역량에 관계된 일과 프로젝트, 함께 일하는 회사와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다시 삶과 일의 경계가 사라지고 부담은 늘어나고 시간은 부족해졌다.
‘정말 우리가 힘든 게 맞을까요?’ 금요일에 동유 대표가 말했다. 우스갯소리인 것 같았지만 사실 가볍게 들리진 않았다. 진짜 힘든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지금은 아직 여력이 남아있다. 진행이 되고 있고, 문제는 있지만 해결하며 나아가고 있다. 삶은 들여다보면 모두 비극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틀린 말이어도 상관 없다.) 나는 지금 어쩌면 낙관으로 가기 위한 비극적인 순간을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못된 마음인지 모르지만, 그럴 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런 상황을 겪었겠지, 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얻는다.
특히 나보다 더 낫고, 더 훌륭해보이고, 더 잘하고, 더 멋있어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표님은 어떠셨어요? 욕먹으면서 일해본 적 있으세요? 관계가 안좋은 사람에게 시달린 적 있으세요? 너무 힘들어서 길을 잃었던 적 있으세요? 말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그런 일 수두룩 하지, 원래 그렇지, 일하다보면 그런 건 당연한 것 같아. 그리고 나오는 말도 비슷하다. 결국 다 지나갈 거야, 잠깐 숨 좀 돌려보면 돼, 그냥 그런 일도 있더라, 머리 비우고 해보는 거지, 뭐. 마지막 말도 또 비슷비슷. 그래도 좋은 거야, 잘 되고 있는 거잖아, 손가락만 빠는 것 보단 나은거야, 잘하고 있다는 거니까, 힘 좀 내보고.
지난 주에는 정말 어두웠다. 아니, 지난 주부터 이번 주까지. 마치 동굴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일만 했는데, 그 일에 확신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그저 해야하는 일을 쳐내기에 급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에 맞춰서 삶을 꾸려나가다보니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더욱 채워지지 않고 소모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해지는 거지.
목요일엔 형덕님과 진규님을 간만에 만났다. 생각해보니 우리 인연도 꽤 길다. 라인프렌즈에서 나올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니까, 벌써 4년? 따지고보면 같은 회사에 있을 때는 그다지 같이 일을 하거나 하진 않았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는 건지 신기하기도 하다. 아마 형덕님이라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엔 두 분 다 너무나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부족해서 아직 마케팅적인 결과가 시원찮다는게 늘 마음에 쓰인다. 더 잘하고 싶지만, 사실 이상하게 늘 우선순위가 앞서지 않은 일이 되기 일쑤라서 더욱 송구스러운 마음뿐이다. 여튼, 오랜만에 만나 이런 얘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나의 넋두리를 두분은 너무 잘 들어주신다. 심지어 진규님은 최근에 비슷한 일을 겪기도 하셨단다. 형덕님이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셨는데, 진상의 존재는 어디에나 있구나 싶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여전히 아직이었다. 사실 나가기 전까지도 너무 바빠서, 취소해야하나 생각했지만 그냥 나가서 함께 시간을 보낸게 너무 다행이었다. 지친 마음이 조금 괜찮아졌고, 약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그리고 나서 밤에 작업한 제작물이 그동안 계속 문제였던 상황을 조금 나아지게 했다.
오늘은 다음주에 오픈하는 팝업 현장에 다녀왔다. 직접 네임태그 같은 쇼카드를 만들어서 손으로 다 자르고 사이니지에 넣으려고 했는데 사이즈를 잘못만든게 아닌가. 역시 디테일이 떨어지는 나, 손으로 하는 거 잘 못하는 나, 여전히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렇게 부족한 부분은 ‘그런’ 상태로 남아있는데 그나마 내가 지키고 싶었던 ‘그런’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만 있다.
현장을 돌아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제작 발주도 다시 해야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역을 향해 걷다가, 뚝섬역 인근에 무비랜드가 있는걸 떠올리자 괜히 보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갔다. 영화는 예매하지 않았고 그냥, 진짜 그냥 갔다. 성수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놀러온 사람들, 어딘지도 모르는 팝업에 줄 선 사람들, 외국인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무비랜드에는 지우님과 훈택님, 그리고 모춘님과 소호님도 있었다. 늘 반갑게 맞아주는 모춘님과 소호님, 모베러웍스 식구들. 그분들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분들을 만나면 말이 많아진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가면서 약간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유독 내가 TMI 를 말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춘님이 그 중 한 분이다. 모춘님을 만나 이래저래 두서없이 지금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런 얘길 막 하고 싶어서 막 떠들었다. 위로를 받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그냥 무비랜드가 보고싶어서 간 거였는데 또 앉아서 바쁜 사람 붙잡고 이래저래 넋두리를 하고 말았다. 모춘님처럼 잘하는 플레이어도 어떨 땐 힘든 상황을 지나치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가 터지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러면 나는 어쩌겠나 싶기도 하다. (우습게도 그런 게 좀 위안이 된다.) 모춘님도 무비랜드를 만들었지만 앞으로 더 ‘우리(모빌스그룹)’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그런 거, 그래, 그런 거.
‘그런’ 게 대체 뭘까?
결국 내 숙제는 그런 것 같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그런’ 거. 잠깐 며칠이라도 속세에서 떠나봐야 한다고, 모춘님이 말했다. 그리고 소호님의 따스한 마음이 담긴 아이스커피까지 받아마셨다. 그렇게 잔뜩 받아 먹고 혼자서 마음껏 떠들고 환한 인사만 가득 받고 나왔다. 기운을 받는 것도 송구스러운 일이다. 나도 기운을 주는 사람이고 싶은데, 나는 정작 여유가 없어서 골방에 박혀 있으면서.
감성적이 되지 말아야지, 살짝 다짐한다. 그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살짝만. 이제부터는 ‘그런’ 거를 찾는 일에 좀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내가 변화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종로 킨코스에서 출력물을 찾아서 을지로 입구에서 버스를 타는데, 두 팀의 시위대를 만났다. 조국 대표도 보았다. 유명한 사람을 보니까 좀 신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햇살 뜨거운 주말에 나와서 자신의 생각을 외치고 있었다. 모두의 생각, 모두의 마음, 그것이 거리 위에서 들끓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러기가 제일 힘든 거지만,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 내가 못하는 일이라고 잘라낼 줄도 알아야할 것 같다. 오늘 안에 기획안 3개를 끝내자, 가 아니라 오늘은 6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일하자. 사소할 지 모르지만 나에겐 기준의 변화로 느껴진다. 숙제가 아니라 태도로,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경계를 넘어버린 상태이니까.
그럼에도 지켜야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완벽보다 건강이 더 중요하고, 행복보다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영리하게 생각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며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낭비하는 시공간을 최소화 시켜야 할 것이다.
오늘 의백 실장님이랑 다이소를 다녀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알고 있는 거였는데, 이야기하다 문득 튀어나왔다.) 야마자키 료씨의 회사를 가서 직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늘 밝고 즐거워보이지만 진짜 생각 이상으로 너무너무 열심히 일한다고. 어찌보면 일을 한다는 건 어쩔 수 없이 힘들 수 밖에 없는 것일 수 있겠다고. 사실이다. studio-L의 야마자키 료씨는 ‘커뮤니티 디자인’이라는 개념과 ‘커뮤니티 디자이너’라는 일을 만든 사람인데, 직원들은 총 20명(일부러 늘리지 않고 유지하는 규모)의 커뮤니티 디자이너이다. 야마자키 료씨는 커뮤니티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정체성’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쉴 때도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 가서 쉬고, 주민들을 만나고, 필요하면 주말에도 가고, 밤에 식사를 같이 하기도 하면서 일을 한다고. 실제로 이번에 오사카 가서 스태프들을 만났을 때, 저 때문에 주말에 나오셔서 죄송해요, 라고 했더니 다들 웃으면서 우리는 그런 거 없어요, 라고 말하는 걸 직접 보기도 했다. 야근, 밤샘, 이런 것도 쉬이 있는 일이었다.
형덕님, 진규님이랑 이야기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딱히 밤새고 일이 많은 게 힘든 건 아닌 거 같아요. 일이 많아서 그런게 아니라, 일이 힘든 이유가... 그런 게 아니라면, 그럼 대체 '그런'게 뭘까.
어쩌면 나는 새롭게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일하는 방식과 태도, 생각과 방향이 달라져야만 할지도, 그래야만 적응할 수 있는지도. ‘그런’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열심히’하는 것과 그래서 더 헌신해서 ‘오랫동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내 의지로 그동안 경험하지 않았던 상황에 스스로 걸어들어왔으니,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딱딱한 껍질을 부수지 않고선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맞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지금의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의 방향을 상상해야 한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은가. 어떻게 하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있게 해줄 ‘그런’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