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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Jul 20. 2020

사진관을 지었습니다.

제주에서 사진관을 합니다만, 01


# 제주에 사진관이라면 응당,


  섬의 동서남북 어디여도 좋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해안가에 너른 실내 공간. 구조재를 드러낸 삼각 지붕은 훌쩍 높은 것이 어울린다. 빛이 잘 드는 가운데 작은 단상은 바닥보다 조금 높아서 고요한 바다 가운데 솟은 암초 같아 보일 거다. 단상 위로 모델이 올라가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사는 카메라를 들고, 주변으로 카페 테이블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모델과 사진사를 본다. 촬영은 공연처럼 펼쳐지고, 둘은 연주자이거나 무용가가 된다.

오름 사이의 올레길 어디쯤에 작은 돌집이어도 좋겠다. 한쪽 벽에 낡은 배경천을 걸어두면 반대쪽 벽에 딱 붙어야 겨우 사진 찍을 거리가 나올 만큼 작은 곳이다. 주변으로 무엇도 없어서 돌집이 풍경이 되는 아주 작은 사진관. 좁은 공간에서는 따로 할 것도 없으니까 아침마다 문 열면 비질이나 두어 번 해 두고, 언제 올지 모르는 여행자가 들려줄 어느 길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진사의 모습과 그곳에서 찍어내는, 화려하지 못해도 차분하게 오래 볼 만한 사진 한 장. 제주의 기념품 같은 사진들.

제주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붙이면 사진관에 대한 기대도 변한다. 제주까지 와서 차 막히는 시내를 지나고 운 좋게 주차 자리를 찾아야 하는 사진관을 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그리는 제주의 사진관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현실과 타협하고, 대부분의 타협에서 물러서는 쪽은 안타깝게도 상상이다. 현실은 힘이 세니까. 첫 번째 상상보다는 조금 작고, 두 번째 상상보다는 조금 붐비는 곳이지만 제주에 사진관을 지었다. 


시간순으로 놓자면, 이번 사진관은 내 세 번째 작업실이다. 앞선 두 곳의 작업실(그때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촬영이 아니어서 작업실이라고 불렀다.)은 중국 상하이에 있었다. 처음 꾸렸던 작업실은 상하이 시내를 흐르는 작은 강, 수주허苏州河를 끼고 있는 오래된 창고 단지의 옥탑방이었다.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오래된 대형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에 내리면 넓은 옥상이 나타나고 그 한쪽에 작업실이 있었다. 백미는 강 쪽으로 난 큰 창문과 지붕으로 이어진 작은 철계단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눈 아래로 강이 펼쳐졌는데, 상하이와 주변 도시를 오가는 모래운반선이 지나다녔다. 작업실 옆면에 붙은 수직의 철계단을 오르면 옥상 위의 옥상이 있었는데, 창고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밤중에 계단을 붙잡고 올라가면 상하이 시내가 다른 모습으로 보이고는 했다. 그곳에서 3년쯤 지내며 처음 내 이름으로 된 사진들을 잡지에 내보내고, 내가 찍은 사진이 광고판에 걸리는 것도 보았다. 작업실이면서 집이기도 했던 그때는 낮에 사진을 찍고 나면 밤에는 대형 스티로폼 반사판을 눕혀 침대로 삼았다. 모든 시작처럼, 어렸고, 아는 게 없었다. 일은 들쑥날쑥했지만 운 좋게 렌트비를 일찍 해치운 달에는 남는 돈으로 오디오 장비를 사거나 여행을 가며 보냈다. 

두 번째 작업실을 연 것은 첫 번째 작업실을 접고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그 사이에 나는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되었다.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모델과 스타일리스트까지 모여서 진행하는 촬영은 왁자지껄하고 신명 나는 날들이었지만 처음 마주하는 작업들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냉장고 내부를 온갖 야채와 신선물로 채워 찍던 날, 스무 명 가까운 사람이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사진은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고, 하필 출구 쪽에 앉아 있는 게 클라이언트가 아니었다면 몇 번은 도망쳤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열명 가까운 스탭이 함께 밤을 새웠다. 새벽 야채 시장이 문을 열자마자 새 야채를 사 와서 겨우 촬영을 마무리했던 기억도 있다. 두 번째 작업실을 정리하고 두어 해를 더 보낸 뒤, 우리 가족은 상하이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왔다. 


# 그래, 짓자.


‘사진관이 왜 필요해?’

처음 이주 계획에 사진관은 없었다. 이 아름다운 섬에 별도의 공간이 왜 필요할까? 눈 닿는 모든 곳이 배경이고 모델이 서는 어디든 풍경이 되는데. 하지만 집을 준비하는 어느 시점엔가 슬며시 설계도에는 마당 한편에 작업실 공간이 들어섰고, 어느새 나는 용접기를 들고 사진관을 만들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앞선 두 번의 작업실은 예행연습이었던 것처럼 있어야 할 것과 빼도 되는 것, 챙겨야 할 것을 알려주었다. 내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을 만큼 좋은, 그렇지만 상하이와는 다른 현실에 맞는 사진관이 내가 지어야 할 사진관이었다. 작고 간결한 공간을 그렸다. 건축비 대부분을 은행에게 빚지고 시작하는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했다. 사진관의 기초와 외부공사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내부는 전문가 한 명과 함께 직접 마무리하기로 했다. 집 짓는 동안 어깨너머로 수평 맞추는 법, 구조를 짜는 법을 익히고 용접도 따라 배웠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유튜브를 찾아가며 따라했다.

집이 올라가면서 사진관도 함께 올라갔다. 집 건축은 다른 팀이 전담했으니 나는 온전히 작업실 공사에 매달렸다. 사진관은 일터인 동시에 절반쯤은 놀이터 같은 곳이 될 테니까, 아무리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도 양보 못할 선은 있고, 갖고 싶은 것들은 있다. 설계도에서 야금야금 한 뼘씩 선을 늘려 나갔다. 결국 사진관은 함께 짓는 집과 거의 비슷한 크기가 되어서야 멈췄다. 공간을 그리고, 큰 구조를 용접하고, 2층 사무실을 올리고, 벽면을 채우는 책장을 만들고, 화장실과 창고를 만들고, 바닥을 칠하는 데까지 몇 달이 걸렸다. 넓은 바다에 면하지도 못했고, 미니멀리즘에 충실한 올레길 돌집 사진관도 아니다. 골목길 안쪽에 있어서 지나다가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봄이면 벚꽃이 가득한 길이 이어지는 곳, 작은 골목길 안에 마당을 가진 사진관을 마침내 지었다. 사진관은 상업 스튜디오처럼 텅 빈 채로 마무리했는데, 아기자기한 배경으로 채운 사진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런 사진관은 낯설다. 사진을 다 찍고 돌아가던 사람은 마지막 인사처럼 물었다.


그런데, 공사는 언제 끝나요?


# 제주에 오신 지 얼마나 됐어요?


촬영을 마치고 장비를 정리하고 있으면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래도 아직 이 섬에 다 녹아들지는 못 한 모양인지, 여기 사람처럼 안 보이는 것일까. 내 의지로 선택한 첫 번째 터, 상하이에서 산 시간이 15년쯤이고, 제주는 이제 그 절반쯤인 7년 차에 접어든다. 숫자로만 보면 결코 짧지 않은데, 나는 아직도 불과 얼마 전에 이 섬에 내린 것 같다. 내비게이션의 안내 없이도 갈 수 있는 익숙한 길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계절의 지난 제주가 기억나지만 아직도 이 섬은 내게 동경이고 도전이고 호기심의 대상이다.

제주는 한결같이 아름답지만, 삶의 터전으로서 바라보는 섬은 마냥 낭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상하이에 있을 때는 힘들다고 해도 필요한 것들을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었다면, 여기 와서는 쇼핑이 줄어들고 그마저 당근마켓 중고 거래가 많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제주 생활을 고민하고 있다면 언제든 내 대답은 같다.


여기 참 괜찮아요. 와서 살아보세요.


제주는 상처 입고 주저앉은 것들을 불러 모아서 다독이는 듯한 섬이다. 생활의 규모를 조금 줄이고, 경쟁하고 비교하는 시선을 조금 거두면 다른 종류의 풍요로움이 많다. 여름이면 저녁마다 바다로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해질 때까지 물에 떠 있거나 겨울에는 눈이 내리기를 기다려서 아무 언덕이나 찾으면 눈썰매를 탈 수 있다. 봄에는 보물 찾기처럼 고사리를 뜯으러 가거나 숲 속 산책길에 지천으로 열린 산딸기를 따먹는다. 자동차 트렁크에 작은 의자 두어 개만 넣어 다니면 아무 곳에나 펼쳐서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마치 내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알려줄 것 같은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섬에, 작은 사진관이 있다. 이 섬의 작은 마을 안까지 여러 사람이 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간다. 섬의 사진관은 작고 느려서 급할 것 없으니까,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그 표정들에 새겨진 시간의 작은 흔적들까지 살펴서 천천히 찍는다. 그들에게 제주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한 때의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이제 제주살이도 7년 차에 접어든다. 짧다고 하기에는 같은 계절을 벌써 여러 번 지냈고, 길다고 하기에는 섬이 주는 설레임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 책은 제주에서 살며 발견한 이 섬의 이야기들, 그리고 작은 사진관을 다녀간 사람들이 들려준 그들의 드라마를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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