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좋아하는 이상한 변호사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본래부터 매력적인 존재였던 고래는 유행의 거대한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사방을 유영하고 있다. 마침 내가 찍는 흑백 인물사진의 제목은 ‘고래를 위한 포트레이트’이다. 이야기는 고래 한 마리에서 출발한다. 소설 모비딕은 고래를 쫓는 포경선의 이야기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결코 점령할 수 없는 것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어 마침내 바닥까지 철저하게 부서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극적인 반전이나 고난 뒤의 부활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달려들어 죽는다. 부서져서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배는 다시 떠오르는 않는다. 소설은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갈 수밖에 없는, 그것도 가진 힘을 모두 써 돌진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위로다.
거대한 흰 고래 모비딕과 고래를 쫓는 피쿼드 호의 에이헤브 선장은 서로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나선 여행자 같다. 여행자 중에서도 특히 고집이 센 여행자쯤 될 것이다.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에이헤브의 고래뼈로 만든 다리와 포경선을 향해 돌진하는 모비딕의 지느러미는 종말을 향해 전진하는 같은 물건이다. 날을 벼른 에이헤브의 작살과 포경선의 옆구리를 들이받는 모비딕의 이마도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같은 물건이다.
포경선을 이끄는 사람은 선장이지만, 나는 선원들에게서 더 짙은 인상을 받았다. 끝을 향해 또박또박 자신의 의지로 걸어가는 고래 같은 사람들.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고, 죽음이 거기 있다면 온몸으로 달려가 부서지겠다는 각오로 덤벼든다. 그렇게 걸어가는 걸음들은 순결해 보인다. 아무것도 덧대지 않고,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지 않아서 아름다워 보인다. 드물기는 해도 일생을 고래처럼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보다는 빈번하게, 누구나 한 때쯤은 고래처럼 살았던 적이 있다. 어떤 사태 앞에서 누군가는 고래가 된다. 좌절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에둘러 가지도 않는다. 당신 앞에 놓인 벽을 향해 당신의 몸과 마음을 집어던지던 때가 있었다. 네가 깨어지지 않으면 내가 파멸하겠다던 그때를 지나왔다. 당신은, 당신의 고래를 기억하고 있는가?
제주는 고래의 섬 같다. 포경선에 옆구리를 받치고 풍랑에 지느러미를 다쳐 기진한 고래들이 모여드는 곳. 이곳에서 쉬며 위로받고, 몸을 키우고, 응원을 등에 업고 다시 그의 대양으로 나간다. 그런 자들이 이 섬에 모여 사는 것 같고, 또 그런 한때를 겪으면서 여행자의 신분으로 찾아오는 것 같다. 그래서 작은 사진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고래다. 제주의 사진관이라면 그런 견디는 자들의 드라마를 응원할 수 있지 않을까?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한 시간쯤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보면, 어쩌면 한 명도 예외 없이 저토록 풍성한 인생을 살아왔을까 싶다. 그런데 미디어는 사람을 대할 때 마치 드라마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말한다. 동의하기 싫다. 촬영에서는 대상의 이름 외에는 어떤 정보도 덧댈 것이 없다. 사람을 설명할 때 떠올리게 되는 여러 숫자나 단어 같은 것들을 빼고 오로지 그 사람의 얼굴만 탐내서 빛나게 보여줄 것. 그리고 주인공은 그 대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본다. 새삼스럽지만 당연하게.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닮은 사람이니까,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내가 나에게 묻는 것이다. 그 간절함도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대답들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 표정에서 읽어내고 싶은 것도 비슷해서, 나는 그 사람들을 모델로 써서 결국 내 자화상을 찍고 있다. 위로하고 응원받는.
‘삶’이라는 단어를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때 이른 건방 같지만, 언젠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냥 아껴놓을 수는 없는 단어가 아닌가. 고래가 나타난다면, 내일 같은 건 없는 거니까. 당신의 깊은 바다에서, 고래는 헤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