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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Jul 25. 2020

증명사진은 3만 원입니다만,

제주에서 사진관을 합니다만, 02

어린이집에서 증명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어려서 글자를 모르니 사진을 붙여서 각자의 물건을 구분한다고 했다. 여러 표정을 한 장씩 뽑아서 보냈다.




증명사진은 3만 원이다. 시골 구석에 앉은, 공사도 덜 끝난 것 같은 사진관에 붙은 가격표를 보면 관광지 바가지 상술처럼 보이겠다. 내용을 모르고 가격만 들을 때는 더 할 텐데, 특히 주말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가 그렇다. 제주 여행에서 신분증을 잃어버리고 급하게 재발급받으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지도를 보고 근처 사진관을 검색한 다음 전화를 건다. 


거기, 증명사진도 찍나요?


이어지는 대화는 비슷하다. 일회용 증명사진이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사진관은 미리 촬영 예약을 해야 하며 오늘 예약은 끝났고, 촬영하면 그다음 날에나 사진을 받아갈 수 있다고 말하면 대충 통화는 끝난다. 게다가 가격까지 알려주면 전화기 너머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급하니까 그거라도 찍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손님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다른 사진관을 검색한다. 

제주에 사진관을 열면서 생각한 콘셉트는 동네 사진관이다. 마을 안에 작고 조용하게 들어서서 증명사진부터 가족사진까지 소소한 일상을 찍어주는 사진관. 증명사진은 그중 기본이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문제와 만난다. 조금 일반화해서 말해 보면, 증명사진을 찍는 일은 불편한 경험이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 중에 특별히 기분 좋았다는 이는 좀처럼 없다. 그것은 증명사진을 위해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다. 어색한 얼굴과 언제든 물러설 것처럼 뒷발에 실린 체중.

보통의 증명사진은 앉은자리에서 5분이 채 안 걸린다. 빠르면 1분 안에 촬영이 끝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 휙 불려 가서 잠시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나온 기분. 그런 뒤에 잠시 앉아서 기다리면 사진을 받아갈 수 있다. 사진을 보고 잠깐 동안 음, 어, 흠. 하고는 봉투에 다시 넣는다. 그런 증명사진을 주고 싶지 않다. 

같은 얼굴은 없다. 생김새도 다르고 인상도 다르다. 타고난 생김새에 지나온 시간을 더하면 지금의 얼굴이 나온다. 그러니까 사람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그가 지금의 순간을 대하는 태도와 그의 일상을 드러내는 표정이 우선 필요하다. 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동작이 필요하고 그 동작에 맞는 각도와 또 그 각도에 맞는 빛이 필요하다. 원하는 지점에, 필요한 만큼 빛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증명사진은 이 중 어느 하나도 허락하지 않는다. 사진에 붙은 ‘증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나의 무엇도 증명할 수 없는 표정이 나라는 이름표를 달고 여기저기 서류에 붙는다. 그래서 증명사진은 너무 폭력적이다. 당신의 얼굴이 이게 아닌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화사하고 개성 있는 옷을 벗겨내고 수형복을 입히는 심정으로 당신의 어깨와 고개를 세우고 환한 미소를 지워낸다. 찍으면서 미안하다.


움직이지 마시오. 

가슴과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시오. 

기울이지 마시오. 

이를 드러내고 웃지 마시오. 


온갖 금지와 강제가 더해진 사진. 이런 주문을 반복해서 듣고 나면 모델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목에는 부목을 몇 개나 댄 듯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끼릭끼릭 관절이 로봇 기어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세상 어색한 자세로, 나 같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찍는 사진. 

사진은 대상에게 애정이 생기는 작업이니까, 들여다보고 있으면 매력적이지 않은 얼굴은 없다. 그런 당신을 이런 증명사진 한 장 들려서 돌려보내려니 미안하다. 그래, 한 장 더 찍자. 인물을 찍을 때 속으로 주문같이 읊는 각오는 ‘당신도 본 적 없는 당신 얼굴을 찍어줄게요!’라는 말이다. 찍히는 본인도 모르는 자신의 매력을 나는 볼 수 있다고 믿고 시작한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세를 바꿔가며 그 각도에 맞춰 빛을 찾고 흑백 사진으로 남긴다. 그래서 사진관의 증명사진은 언제나 쌍으로 나간다. 증명사진 하나와 흑백 포트레이트 사진 하나.

증명사진을 예약할 때, 촬영이 30분쯤 걸린다고 미리 알려주면 사람들은 대부분 놀란다. 막상 와서 차 한 잔 하며 안부를 묻고 대화하며 찍다 보면 30분은 늘 넘긴다. 그리고 찾아가려면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 여러 모로 느리고 답답하다.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사진이 많지 않지만, 제주는 그래도 되지 않나 생각한다. 제주는 마땅히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대화하며, 고민과 꿈을 듣고 공감하고 응원한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던 청년, 판소리 세계여행을 꿈꾸는 소리꾼,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뒤 다시 찾아온 소년까지 모두 사진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사진관을 소개받고 서울에서 온 손님도 있었다. 모두들, 좋은 이야기를 나눠 주고 사진을 받아 갔다.

개업하고 4년 가까이 찍었던 증명사진은 이제 촬영 메뉴에 없다. 사진관 일이 조금씩 바빠지면서, 30분 걸리는 증명사진을 찍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동네에 있는 사진관이니까, 마을분들에게는 같은 가격으로 증명사진을 찍어드린다. 여전히 한 장의 흑백사진과 함께.

증명사진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 그 사진은 당신의 무엇도 증명한 적 없다. 당신은 못 보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며 만들어진 아름다운 표정이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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