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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Sep 28. 2022

필체의 기억




사진관에 손님이 오면 자동차가 사진관 입구 자갈길을 밟는 소리로 먼저 알 수 있다. 차 한 대가 들어온다. 자동차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내린다. 어제 급하게 촬영을 예약한 모델이다.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고, 그 책에 넣을 만한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쪽 다리가 약간 불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는 천천히 걸어서 사진관으로 들어왔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한참 퇴고 중인 원고 뭉치를 테이블에 꺼내 놓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일하던 그는 2019년 10월 5일에 쓰러지고,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60년 넘게 충실히 그의 의지를 따랐던 몸 중에서 절반이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이제 곧 만 3년이 되어갑니다. 제가 병원에 꼬박 27개월 있었어요.


27개월. 만 2년을 꽉 채우고 3개월을 더한 시간. 격리된 공간에서 보내는 27개월은 어떤 느낌일까? 공감해 보려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슷한 경험이 없다. 군대에 입대하던 그때라면 비교가 될까? 훈련소 첫날밤 연병장에 집합해서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 불빛을 보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때가 조금이라도 비슷할까? 그는 조금 다르다고 말한다. 


입원하는 날짜는 정해지는데 퇴원하는 시간이 없어요. 그게 힘듭니다. 보통 병은 몇 주, 몇 개월 진단을 받잖아요. 이 병은 그게 없습니다.


기약이 없다. 불편한 몸과 멀쩡한 정신으로 지금 막 들어선 이 터널이 과연 끝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 일정을 잡을 수 없으니 계획이란 것도 성립하기 어렵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내가 예전에는 필체가 참 좋았어요.


메모장에 비뚠 글씨를 쓰며 그는 말했다. 막막하고 포기하려던 그를 처음 설득한 것은 딸이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는 결심을 먹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그리고 6개월을 기간으로 잡았다. 6개월을 잘 해내면 걸어서 나가고, 안 되면 휠체어를 타고 문을 나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보다 한참 더 걸려서 16개월이 지났을 때, 다시 글자를 적을 수 있었다. 그가 쓴 첫 번째 메모에는 100일 도전을 시작한다고 적혀 있다. 


그때는 100일 정도면 나갈 줄 알았어요.


그리고 꼬박 300일을 더 보낸 뒤에야 그는 두 발로 걸어서 병원을 나왔다. 업무 때문에 곧잘 다니던 제주도였는데, 그의 이번 제주행은 5년 만이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직접 운전하는 모든 순간들이 작은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조명을 맞추고, 모델이 의자에 앉는다. 사진관의 고래를 위한 포트레이트는 세 장의 흑백사진으로 만든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그가 겪었을 표정들을 남겨놓기로 합의했다. 


내 3년의 표정이 담겼으면 좋겠어요. 절망과 의지, 희망 같은 거요.


흰 셔츠를 입은 모델의 몸은 적당히 단단해 보여서 병색의 흔적은 없다. 다만 그가 만드는 동작에서 아직 그의 오른쪽은 반박자 느리게 따라온다. 저 동작 하나하나를 만들기 위해 그는 애쓰는 중이다. 머릿속에서 내린 명령이 모든 감각의 끝단까지 누락 없이 가 닿을 수 있도록 강한 의지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그의 몸은 지난 3년의 전투를 통해 일구어 낸 성취의 증거 같다.


재활에 끝은 없습니다. 지금도 계속 운동하고 있지요. 평생 계속해야 됩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것을 보며 그는 퇴원 후의 생활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터널을 지나는 경험을 나누는 것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파봤잖아요. 병에 대해서는 의사가 전문가겠지만 그들은 직접 아파보지는 않았잖아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이 경험을 공유하는 게 도움이 되겠다!


서툰 글씨지만 한 글자씩 적어 내려 갈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일기를 썼다. 그 일기와 병원에서의 경험들을 모아낸 것이 이번에 나올 책이다. 이 책을 갖고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며 비슷한 시기를 겪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다음 계획이다. 이제 다시, 계획할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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