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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Sep 26. 2022

나이 든 남자를 좋아합니다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이 좋다. 같은 남자로서의 공감이거나, 모든 얼굴이 조금씩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년長年에 이른 남자는 탐나는 모델이다. 내가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일 수 있고, 다른 매력적인 피사체들이 거듭 카메라의 대상이 되는데 비해서 이 또래의 보통 남성들은 이제껏 별로 주목받는 피사체는 아니었으니까. 적당히 주름진 얼굴, 살짝 각이 꺾인 어깨, 어딘가 먼 곳을 여행하고 돌아온 눈빛 같은 것들. 남자의 주름은 지난 시간을 보여주는 개인 역사의 기록 같아서, 촬영 때도 가능하면 주름이 돋보일 수 있도록 조명을 조정한다. 부드럽고 넓게 퍼지는 확산광보다는 강하고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빛이 더 어울리고, 정면에서 비추는 빛보다는 측면에서 들어오는 빛을 더 자주 쓴다. 시선은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좋다. 장년의 남성이 바라보는 곳은 지금 여기보다는 그가 지나왔던 곳이거나 가 보지 못한 그 어디쯤일 때가 더 멋져 보인다. 


수컷으로서의 남성은 날 때부터 주체하기 어려운 기운을 갖고 온다. 유전자에 새긴 이 기세는 빼겠다고 빠지는 것도 아니다. 부정할 수 없고 미워할 것도 없는 수컷으로서의 허세다. 사람에 따라서 젊어서부터 겉멋도 건방도 싫다 하며 겸손이 몸에 밴 남자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컷의 허세가 없지는 않다. 어린 때의, 젊은 때의 생물학적 남성이 저지르는 사태나 이루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 허세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리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주체하기 어려웠던 기세는 손아귀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 흩어진다. 피부가 거칠어지고, 주름이 대충 이 얼굴을 어떻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있는지, 주름의 설계도 정도가 보이는 얼굴이 된다. 총기를 잃어가는 눈빛은 한 지점을 지향하는 대신 지나온 흔적을 지문처럼 남겨놓고 있다. 그때쯤 이르면, 젊은것들이 가질 수 없는 새로운 매력이 얼굴에 깃든다. 날 때부터 가진 것이 아니라서 더 귀하고 예쁘다.


이들이 사진관에 제 발로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없다. 아내 손에 이끌려 오거나, 장성한 자녀의 부탁에 마지못해 온다. 사진관 문턱을 넘는 그들의 표정은 떨떠름하며, 어색하고 못 미더운 곳에 끌려왔다는 무언의 저항이 걸음걸이에 드러난다. 나는 못 본 척하며 차 한 잔 하시라고 권하고 함께 온 가족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모델이 되어본 적이 적거나 거의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아본 경험도 없다. 일생 처음 만나는 사진사 앞에서는 오죽일까. 소통에 서툴고, 모난 생각들로 세상과 이리저리 어깨를 부딪치며 온 사람.


제주에는 여행 오셨어요?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세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주변을 돌아 이야기는 당신에게 닿는다. 무심하게 한 두 마디씩 툭툭 풀어놓는 당신의 시간들. 한 명도 똑같은 이야기가 없다. 가만 듣다 보면 시간 가는 것은 금방이어서 촬영 시간은 벌써 반쯤 지났다. 이제 자리를 옮겨 조명 아래 앉아야 한다. 이야기하는 동안 살펴둔 모델의 얼짱 각도에 맞게 어깨를 돌리고, 조명의 크기와 높이를 조절한다. 촬영과 동시에 대형 모니터에 사진이 뜬다. 세상에 빚진 기분이거나, 무엇인지 모르지만 해내지 못했다는 크고 작은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고 서 있는 자의 안쓰러움, 쓰러지지 못해 서 있다는 표정들은 역설적이게도 무척 아름답다. 그래서 사진사에게 저 얼굴은 마음껏 놀아도 되는 놀이터 같다. 자신의 얼굴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별다른 요구가 없고, 마음대로 찍어도 저항하지 않으며, 주름진 얼굴은 좋은 요리의 신선한 재료 같아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잘 나온다. 


이선준은 IMF 이후에 제주에 왔다. 아내에게 남은 돈을 다 주고 주머니에 30만 원만 넣고. 잠시 머물렀던 제주의 인상이 좋았고, 이 섬에 정착하자는 말에 아내는 따랐다. 그때 큰 아이는 초등학생이었고, 둘째는 서너 살 무렵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살아남았다. 속상하신 어머니는 제주 대신 미국으로 가셨는데, 10여 년 이후에나 귀국하셔서 제주에 오셨다. 


10여 년만에 제주공항에서 어머니를 뵙는데, 죄인의 마음인 거지. 눈물이 그렇게 흐르더군.

아내한테 미안하지. 죽을 때까지 미안할 거야.

그럼! 아이들은 마음껏 살게 할 거야.


이선준은 젊었을 때 음악다방 DJ 생활도 했었고, 몇 년 전까지도 인터넷 음악방송을 했었다. 마지막 질문은,


두 시간쯤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떤 음악을 들으시겠어요?


레드 제플린, Stairway to heaven. 그리고 마이클 부블레, Let me go home.


사진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두 곡을 크게 틀고 마지막 사진 몇 장을 찍는다.


최종으로 선택한 몇 장의 사진이 정확하게 어떤 이야기를 하던 무렵인지 알 수 없다. 어머님을 이야기할 때인지, 아내를 보러 가서 교통경찰에게 1만 원 촌지를 건네고 5천 원을 돌려받던 때의 표정인지, 한참 배우고 있는 당구 이야기를 할 때인지, 육지에서 한참 공부하고 있는 아들 이야기 때였는지, 맘껏 살게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밤 9시만 되면 전화해서 어디쯤인지 묻게 되는 딸 이야기였는지.


보시라. 덤비고 쓰러지고 견디고 부서지고 다시 끌어모아서 끝내 다다른 당신의 얼굴이다. 그 시간들을 지나서 마침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초상이다. 생전 처음 보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며 어색해하는 그 곁에 가서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요. 잘 해왔어요. 당신 참 멋있어요.





+

비슷한 또래의 여인의 얼굴을 찍는 방식은 다르다. 꿈을 잊고 아내로, 엄마로 또 며느리로 살아온 이들에게 그 꿈같던 시절을 되돌려 주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행복했던 순간을 물으면 아이가 무엇인가를 이루었던 날이 자신의 행복이었다고 말하고, 마음 상했던 날을 물으면 남편이 속을 썩였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 말고, 아내 말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 질문을 반복해 보지만 가족을 빼고 나면 당신의 삶은 붉은 속살을 다 파내어버린 수박껍질 같아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들에게 주는 사진은 환한 얼굴이다. 남자를 조명하는 방법과 다르게 얼굴 사방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주름 따위는 조금도 안 보이도록 밝고 맑은 얼굴을 만든다. 젊은 여인이 갖지 못한 아름다움 대신 젊음을 추억하는 표정이라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다. 나이 든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은 내 남은 사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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