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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Oct 17. 2022

언덕의 풍경은 바다같아서

들판 사이를 항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 동안 홍원항에 있었다. 새로 지은 멋진 집 한 채를 찍는 작업이었다. 새벽배를 타고 제주를 떠났는데 바람이 심해서 큰 배가 좌우로 많이 흔들렸다. 책을 읽으려고 해도, 컴퓨터를 열어서 글을 쓰려고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누워 자다가 완도에 도착할 즈음 깼다. 배가 도착하고 차를 내리는 데까지 또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빠듯했다. 중간에 자동차 충전을 두 번 해야 해서 충전하는 사이 밥을 먹었다.


전라땅은 가을이 완연해서 추수를 앞둔 벼들의 색으로 언덕이며 벌판이 노랗다. 고속도로는 논밭보다 조금 높아서, 낮은 능선의 풍경을 보는 전망대가 계속 이어진 것 같았다. 육지의 산은 제주와 달라서 또 예뻤다. 모르는 산과 들판이 멀리까지 이어진 풍경은 꼭 바다 같아서, 저 들판으로 들어가면 항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나는 섬사람이 된 것일까? 섬 밖의 낯선 풍경 앞에서 항해를 생각한다.


홍원항은 군산의 북쪽에 있다. 서해안에 있으면서 더 서쪽으로 갈고리처럼 호를 그리며 튀어나와 있어서, 갈고리의 끝 마량포구는 서해안에서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홍원항은 그 옆에, 갈고리의 등 부분에서 북쪽으로 열려 있다. 새로 지은 집은 홍원항을 모항으로 조업하는 큰 배의 선장이 주인인 듯했다. 오후에 도착해서 집주인을 만나 집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이미 입주한 지 넉 달이 가까워서 집 안은 식구들의 세간살이가 필요한 만큼 다 들어찼다. 어떤 것은 치워가며, 어떤 것은 피해 가며 찍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은 찍을 수 없어서 포기해야 한다. 



예약해둔 근처 민박집에 짐을 풀고 항구를 산책했다. 서해의 물빛은 제주와 달라서 다른 물고기가 살 것 같았다. 홍원항 주변은 한 집 건너 한 집이라고 해도 될 만큼 낚시점이 많았는데, 아마 낚시객을 상대하는 배들이 각자의 손님들을 위한 낚시점을 열고 있는 것 같았다. 홍원항이 속한 서천군 서면에 있는 서도초등학교는 내가 본 중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학교다. 학교 정문에서 2차선 도로 하나를 건너면 바로 바다다. 만조 때 바다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오면 운동장에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바다에 줄을 맨 어선은 물이 빠지면 기울어진 채로 흙바닥에 주저앉는다. 이곳의 아이들은 들물처럼 등교하고 날물처럼 하교할까. 매일 보는 바다 앞에서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가질까. 나는 서도초 뒤편 순댓국집에서 하루는 순댓국, 하루는 뚝배기불고기를 먹었다.


일출과 일몰은 내 작업시간이라 마량포구의 일출과 일몰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일출 전에 홍원항 근처 일터로 와서 오전을 찍고, 숙소로 돌아갔다가 오후에 다시 와서 일몰 뒤에 작업을 마쳤다. 해뜨기를 기다려서 드론을 올리면 멀리 동쪽 하늘부터 붉게 변해왔다. 날씨가 좋아서 작업은 순조로웠다. 원하는 시간에 기대하는 빛이 왔고, 바람도 없어서 드론 비행도 문제없었다. 공간에 담은 건축사의 고민은 잘 드러나서 예쁘게 담겼다.


마지막 날 새벽 촬영으로 작업을 마쳤다. 돌아가는 배는 완도에서 오후 3시에 출발하니까 여유 있다. 올라올 때와 다르게 느긋한 마음으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강진에서 두 번째 충전을 했다. 몇 년 전 한 번 들렀을 때 너무 마음에 들어서 괜히 혼자 아는 척하는 이름, 강진. 주변을 지날 일이 있으면 동선에 끼워 넣고, 특별히 무엇을 본다기보다 읍내를 그냥 걷는다. 농어촌진흥공사 강진본부에서 충전기를 연결하고, 20분 남짓한 충전시간 동안 주변을 산책했다. 남쪽은 따뜻해서, 새벽부터 입고 있었던 외투를 모두 벗었다. 아내와 통화하며, 나중에 육지에 살게 되면 강진에 살고 싶다고 말했다. 강진에서 고금도를 건너 완도까지 오는 중에 바다빛이 예뻤다. 근처에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는데, 청자의 빛깔이 바다를 물들이면 딱 저렇겠구나 싶었다. 


배는 완도항을 떠난 지 한 시간, 바다 가운데 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무릎에 올려두고 출장 기록을 쓴다. 아내와 마루가 있는, 제주 내 집으로 돌아가야지. 나의 모항으로 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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