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20 베스트 영화에 대하여
씨네21 1301호, 2010~2020년 최고의 영화 10편 설문에 참여했다.
종합 결과는 씨네21 포함 여기저기서 확인 가능하고, 내가 보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
: 바르다의 얼굴이 곧 영화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할 영화
2. <강변호텔> 홍상수
3. <살인마 잭의 집> 라스 폰 트리에
4.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
5.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우에다 신이치로
6.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난니 모레티
7. <헤이트풀8> 쿠엔틴 타란티노
8.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
9.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0.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처음엔 1위를 제외하고 순위를 매기지 않은 채 보냈다. 다들 그렇겠지만 좋은 영화들에 순위를 매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10년 간 좋게 본 영화들 중 열편을 뽑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서 차마 순위까지 매길 에너지가 없었기도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순위를 정리해 점수를 집계해야하는 입장에선 점수 계산이 또 어려웠던 모양이다. 가급적 순위를 매겨달라는 재요청 연락이 와서 굳이 굳이 순위를 매겼는데, 지면을 확인해보니 그래도 무순으로 되어 있는 리스트가 많아서 그냥 무순으로 할 걸 후회함.
또 하나의 후회는 이 리스트에 은근히 자유도가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난 그걸 몰랐다!) 열한 편의 영화를 뽑은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후보 영화들 전부를 동봉한 사람도 있었다. 선정의 변 또한 이렇게 전부를 그대로 실어줄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고심해서 적었을 것 같다.
우선 이 상징적인 리스트에 아녜스 바르다, 홍상수, 라스 폰 트리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무조건 한 작품 있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네 편을 골랐고, 비슷한 의미로 타란티노의 영화 중 한 편을 꼽았다. 즉 내 리스트는 어차피 10편으로 못 추릴 거, 상징적인 작품들을 골라보자- 해서 작성한 리스트이다.
1.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얼굴’이라는, 영화가 아무리 발전하고 변화하고 다른 기술과 결합하고 카메라를 세우고 돌리고 길게 찍고 길게 안 찍고 이어 붙이거나 어긋나게 하더라도, 등장했을 때 어찌 됐던 다른 모든 요소들을 잡아먹고 2010년이든 1950년이든 2222년에든 메인의 자리를 차지해버리는 ‘얼굴’에 대한 바르다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이 영화의 얼굴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더 좋았고, 특히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영화 만들기의 우연성은 이 영화를 신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2.
홍상수 영화 중 도대체 무엇을 뽑아야 할지 고민하다 <강변호텔>을 뽑았다. 난이도가 2010년대 영화 중 열편을 뽑는 것 정도의 어려움이었다. 그냥 홍상수 영화 전체를 리스트에 올려버려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는 조금 오바고 아무튼 그정도였다는거. 그러다 영화관에서 처음 봤을 때 가장 임팩트 있었던 영화를 뽑았다. <옥희의 영화>, <북촌방향>, <다른나라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 <풀잎들>이 그 후보였는데, 최종적으로 <풀잎들>과 끝까지 고민하다가 첫 카메라 핸드헬드였다는 작은 이유로 <강변호텔>을 선택했다. 분명 사소한 차이이지만 홍상수 영화에서는 그 작은 차이가 세상의 전부이기도 하니까.
3.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도 <님포매니악>과 고민을 많이 하다가 그냥 최신작 <살인마 잭의 집>을 뽑았다. 이 사람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금기인 것이 무엇일까’를 변태적으로 실험하는 듯하다. <살잭집>은 사람들에게 마침내 ‘살인’을 설득하는 영화인데, 결국 내가 이 주인공의 궤변에 두 손 들었던 관람 경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님포매니악>은 이미 마음속에 ‘열릴 준비’를 하면서 본 것이라면, <살잭집>은 문을 꼭 닫고 있던 상태에서 시작해서 결국 열었던 거라 가산점인 거다. 잭의 방문에 잠갔던 문을 마침내 열고(결국 죽는)마는 영화 속 캐릭터가 나.. 오직 영화에서만 가능한 궤변과, 그리고 영화였기 때문에 넘어간 나. 여기서 영화를 느꼈다.
4.
<페인 앤 글로리>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히 말하기 힘들다. 완벽하지 않은 첫 관람으로만 이 영화를 어렴풋이 파악한 상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 당시의 흥분이 또렷하게 남아있기에 이 영화를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어디까지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인지 경계가 모호한데, 그 모호한 경계에서 차라리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서 허우적거리고 싶다. 일종의 환각 상태인 것 같기도 하고.. 분석하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다.
5.
같은 뉘앙스의 완전 반대편에 있는 영화가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이다. 이 영화의 아주 작은 단점은 영화의 크레딧과 동시에 ‘실제 실제’ 원컷 촬영 현장이 나온다는 거다. 그 장면이 나오기까지 이 영화는 <페인 앤 글로리>처럼 그 모호한 경계를 소중히 지켜오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사실 이랬답니다 짜잔~” “이게 진짜랍니다~”가 나오면서 조금 김이 새긴 하지만, 이를 제외하곤 ‘하나의 영화 만들기 현장’에 관한 너무나 소중한 기록 같은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재밌다. 지성과 무지성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영화.
6.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역시 지성과 무지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 역시 재밌다. 이 영화의 엔딩은 지구인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아닐까 싶다. 교황이 교황으로 선출된 날, 나 교황 안 할래! 라고 선언하며 관중들을 등진 채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다.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고, 펄럭이던 깃발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바티칸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 콘클라베의 현장에 한 명의 외부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 캐릭터를 영화의 감독 본인인 난니 모레티가 연기한다. 과정이 외부에 절대 공개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관찰자 영화감독에 의해 깨지는 것이다. 난니 모레티의 또 다른 2010년대 영화 <나의 어머니>와 고민하다가 <우교있>을 선택했는데, <나의 어머니>가 대놓고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라면, <우교있>은 이 관찰자를 통해 어렴풋이 영화 만들기에 대한 뉘앙스를 풍긴다.
7.
<헤이트풀8>은 내겐 <펄프픽션>이나 <저수지의 개들> 급 영화이다. 하나의 공간 속에서 여러 인물들의 대화로만 영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무척 연극적인 영화. 영화에서 분명 ‘서사’는 여러 평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 영화만큼 서사적으로 훌륭한 영화가 있을까 싶어서 순위에 올렸다. 이 영화를 순위에 올려야 했기에, 다소 마음 편히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이기도 하다.
8.
<보이후드>는 이런 방식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를 감탄하면서 본 영화다. 12년간의 리얼 타임 촬영 방식은 다큐멘터리에서나 가능한 건줄, 아니 다큐멘터리에서도 어려운 일인데 이걸 픽션으로 만든 감독의 고집? 이걸 고집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걸까 싶은 정도의 발상?을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9.
2010년대는 아녜스 바르다가 세상을 떠난 시기, 그리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세상을 떠난 시기, 두 개로 요약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카피하다>를 아홉 번째 순위에 놓은 것은, 순전히 이 영화가 키아로스타미의 모든 좋은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 아래 순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한 번 보고 더 이상 보지 않았지만, 진품과 복제품, 실제와 역할극,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와 실제, 나아가서 (역시)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모호한 잔상이 남아있다. 거기에 더해 이미 너무나 위대한 한 작가가 모국을 떠나 외국에서 찍은 도전 같은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소위 천상계였던 사람이 또 다른 세계의 탐험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정말 상징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덜 언급된 게 너무 아쉽다.
10.
2010년대 리스트를 작성하며 2020년대를 예언해보고 싶었다. 누가 10년 뒤에도 살아남아있을까, 했을 때 떠오른 사람은 데이빗 로워리다. 그의 작품들 중 고민 없이 <고스트 스토리>를 골랐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나 <미스터 스마일>을 다 봤지만, 둘 다 뭔가 감독 자신이 만든 세계라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세계라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고스트 스토리>의 유령 세계는 데이빗 로워리 고유의 세계다. 물론 사후 세계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상상당한 영역이지만, 이 영화엔 로워리가 창작한 유령의 시선이 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죽어서도 기다리기. 혹은 기다리다 죽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 또한 순서가 반대일 수도 있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기다린다. 영화 같다. 근데 그래서 영화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11, 그리고.
그 외에 넣고 싶었던, 끝까지 갈등했던 영화들 목록. 열번째 상징적인 영화로 마지막 순간까지 래드 리 감독의 <레 미제라블>(2019)을 고민했다. 사프디 형제 영화 중 <언컷 젬스>. <매드맥스>는 정말 넣고 싶었고, <위플래쉬>, <아무르> 또한 그랬다.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도 있다.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 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도 후보였다. <아이리시맨>도 정말 기념비적인 영화인데 넣지 못해 아쉽다. <토리노의 말>이나 <홀리 모터스>는 나 말고도 많이 언급할 것 같아 제외했다. <기생충>은 생각도 안 했는데 1위라 깜짝 놀랐다. <로마>도 뭐.. 상징적이긴 하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아직 감을 못 잡겠어서 제외했다. 고다르 영화 또한 그렇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가 과연 10년 뒤에도 리스트에서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하다. 최근 영화라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노 홈 무비>, 그리고 <퍼스트 카우>를 비롯한 켈리 리처드 감독의 영화는 얼른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정말 <기생충>이 한국 매체에서 1위인 것은 조금 그렇다! <기생충>이 안 좋은 영화라기보다는.. 그냥 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