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2학기’라는 시기만큼 너와 나의 다름이 크게 느껴지는 시기가 없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는 너가 있고, 지방으로 대학을 가는 너가 있고, 체육 실기, 음악 실기, 미술 실기를 준비하는 너도 있고, 재수학원에 들어가는 너도 있다. 아니 애초에 아예 수능을 보지 않는 너도 있다. 같은 시간에 학교에 도착해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시간에 같은 메뉴의 밥을 먹는, 그런 시기를 같은 날에 시작해 같은 날 마무리하는 같은 학년인데도, 우리의 다음 학기가 이렇게나 다를 줄은 몰랐다.
<3학년 2학기>는 용접공 같은 영화다. 졸업 후 얼굴을 보지도, 그 소식을 듣지도 못한,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너’들을 나의 세상에 붙인다. 용접은 상당한 전문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도구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동작을 해야만 한다. 그걸 3학년 2학기 때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엔 빛이 있다. 용접을 하면 빛이 나온다. 이 또한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이다. 이 빛은 절대 맨눈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용접을 할 땐 반드시 보호 안경을 써야 한다.
나는 영화 덕분에 그 빛을 보호 안경 없이 볼 수 있게 된다. 스크린이 보호 안경인 셈이다. 아니 사실 영화는 늘 보호 안경이었다. 나는 영화를 통해 너무 안전하게 위험한 것을 본다. 그 반대편에 너무 위험하게, 위험한 것을 보고 있는 너가 있다. 너와 나는 같은 3학년 2학기를 보냈지만, 매우 다른 ‘3학년 2학기’를 보냈다.
반면 <3학년 2학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은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들이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나눠 먹는 맥모닝, 가족에게 첫 월급으로 산 허니콤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는 처음 받는 근조 문자, 친구들과 나눠 먹는 편의점 폐기 음식, 동생이 쓰고 있던 한 쪽만 들리는 유선 이어폰, 그 동생에게 1+1으로 선물한 무선 이어폰, 그리고 지금의 나와 정말로 같은 위치에 붙인 같은 모양의 파스들까지. 영화에 내가 실제로 한 번쯤 경험해 본 것들이 등장할 때마다, 그래서 너와 나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계속해서 너의 3학년 2학기 이후의 삶이 궁금해진다.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데 너는 어떠한 삶을 보내고 있을까? 너 또한 삼겹살에 김치와 미나리를 구워 먹는 것을 좋아할까. 가끔 돈을 모아 오마카세나 호캉스를 즐기기도 할까.
<3학년 2학기>는 흔히 말하는 사회파 영화로 분류될 작품이 틀림없지만, 보다 보면 자꾸 사적인 감상이 떠오르게 되는 영화다. 이게 ‘좋은 영화’의 조건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토론이 필요할 것이지만, 분명한 건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은 맞다. 그런 관점에서 비교될만한 영화는 소라 네오 감독의 <해피엔드>와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이다. <해피엔드>와 <여름이 지나가면>의 엔딩엔 공통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 아이들이 있다. 방금 전까지 같은 시기를 보냈던 아이들이 끝내 갈라지는 순간이 두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약간 과장을 보태서 스펙터클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반면 <3학년 2학기>는 그 순간 이후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뭔가가 이미 갈라져 버린 곳엔 클라이맥스나 스펙터클이 없다. 대신 채워져 있는 것은 일희일비의 시간들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매우 판타지처럼 보인다면, 그건 이 엔딩에 너무 많은 희喜가 몰려 있어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