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1515호에 < 28년 후 >와 < F1 더 무비 > 두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썼다. 두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월드와이드 개봉한 영화로, 각각 좀비(재난) 영화, 스포츠 영화라는 극장에서 제일 보기 좋은 장르(껍데기)를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다. 바꿔 말하자면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기 제일 좋은 장르, 그리고 그걸 시리즈화하여 계속 이어가기에도 적합한 장르인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두 영화가 내세우는 감각이 비슷하다. 속도감. 두 영화 다 적들보다 빨리 달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들의 위험천만한, 하지만 동시에 좋은 구경거리인 이 ‘달리기’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변주되어 시리즈를 이어갈 것이 분명하다. 관객을 계속해서 극장에 불러 모으기 위해선, ‘극장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선, 이 달리기를 이어갈 기반이 잘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렴풋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주제를 잡고 쓴 글이다.
속편을 만들게 되는 본심, 돈 벌고 싶은 마음 당연히 다 이해가 가는 바이지만, 그래도 ‘돈 많이 벌고 싶어요’하는 식당보다, ‘손님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거 대접하고 싶어요’하는 식당에 더 마음이 기우는 법이니까. < 28년 후 >와 < F1 더 무비 > 중 한 편은 돈 벌고 싶은 마음을 잘 못 숨긴 것 같이 느껴졌고, 다른 한 편은 정말 순수하게 다음 ‘달리기’가 궁금해지는 이야기를 선보였다고 생각했다. 그 영화의 다음 편은 기꺼이 내돈내산하고 싶다. 그 영화가 무엇인지는 전문을 확인해 주시길!
“계속 원만 그리며 달리는 게 이제 지겹다.”
니키 라우다(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F1 드라이버, 1949~2019)
비슷한 시기에 월드 와이드로 개봉하여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28년 후>와 <F1 더 무비>에는 개봉 시점 외의 묘한 공통점이 있다. 첫째론 두 영화의 서사에 30년에 달하는 긴 시간의 역사가 암시되어 있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베테랑과 루키 간의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베테랑이건 루키건 간에 반드시 적들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야만 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울타리 밖에서든, 트랙 위에서든. 아니 어쩌면 울타리 안에서든, 트랙 아래에서든. 그 공통점 때문일까. 각각 좀비 영화와 스포츠 영화라는 전혀 다른 외피를 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를 보며 떠올리게 되는 질문은 같다. 그들은 왜 달리는가. 울타리 안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죽음의 위기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경주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겹다"라는 말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그 말을 번복하고 다시 트랙 위에 오른 니키 라우다처럼, 수많은 동료 대원들을 잃고도 또 한 번 벽 밖으로 향하는 <진격의 거인>의 조사병단처럼,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와 소니(브래드 피트)는 그 모든 일을 겪고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과거를 바꾸기 위해 달리기
“왜 돌아온 거예요?” 곧 그를 사랑하게 될 케이트(케리 콘돈)가 소니에게 묻는다. 사실 소니는 영화 내내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받는다. 그러면 그는 150분 동안 그 이유를 온몸으로 보여줄 것이고, 그렇게 관객은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가 계속해서 속도를 내는 그 아찔한 행위에, 납득할 만한 명분만 주어진다면 말이다.
물론 영화 외적으로만 따져 보면 주인공이 달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이야기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특히 트릴로지로 기획된 <28년 후>는 물론이고, 벌써부터 속편 제작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 <F1 더 무비>와 같은 시리즈 영화의 경우는 그 달리기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곧 이유이자 목적이 된다. 허나 그 욕망을 관객에게 대놓고 드러낼 수 없기에, 영화는 주인공에게 그럴듯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그 내적 동기가 탄탄할수록 영화가 더 오래오래 달린다). 다시 말해 '속도를 즐기기 위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달린다’는 행위는 먼저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후 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이 관습적인 순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가끔 그 순서를 뒤집어버리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더 달리기 위해서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찾기 위해 달리는 영화. 관객을 수단으로 삼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을 향한 목적이 있는 영화. <28년 후>와 <F1 더 무비>는 그 방향에서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먼저 <F1 더 무비>의 경우, 소니가 다시 F1 레이싱 카에 몸을 싣는 이유는 오직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이다. 그가 돈이나 인간 관계에 관심이 없다는 건 그의 대사나 행동을 통해 쉽게 확인 가능하며, 그가 잊지 못하는 과거의 기억은 화면에 여러 번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F1 더 무비>의 문제는 영화가 이렇게 명백한 소니의 동기를 끝까지 모르는 척 포장한다는 것이다. 엔딩에 영화 내내 반복했던 운전을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재차 던지며 관객에게 여운을 선사하려 하지만, 이 영화와 소니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F1 더 무비>가 그 대신 모호하게 남겨뒀어야 하는 것은 소니의 과거이다. 그가 바꾸고 싶은 과거의 형태가 성공이 아닌 죽음이었다는 암시를 남겨두었다면, 다시 말해 그가 과거의 끔찍한 사고의 결과로 자신이 죽었어야 됐다며 갈등하는 인물이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주변인들이 품는 소니에 대한 의구심이나, 확인하지 않는 행운의 카드에도 설득력이 생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니게 됐을 장치는 그가 감행하는 ‘플랜 C’다. 상위권 팀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고의로 사고를 내는 소니의 전략은 지금으로선 베테랑의 재치를 보여주는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반면 그가 죽음을 고민하는 인물이었다면, 그가 조종하는 차량의 속도에서 더 복합적인 스릴이 느껴졌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이 부분은 고의 사고를 승부조작 급 부정행위로 보는 F1 마니아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지점이기도 하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달리기
반면 <28년 후>의 스파이크는 그 누구보다 뚜렷하고 단순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다시 한번 울타리 밖으로 향하는 이유는 엄마를 잃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다. 그렇게 죽을 각오로 좀비를 피해 달리던 스파이크는 의사인 켈슨(랄프 파인즈)을 만나, 멈추게 된다. <28년 후>는 이 지점에서 다른 ‘속도 영화’들과 정반대의 길을 간다. 켈슨은 빠른 속도로 좀비를 제압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속도를 유지한 채 좀비를 멈추게 하는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더 빠르고 치열해야,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아야, 그래야 더 오래오래 달릴 수 있게 되는 상업 영화의 논리를 따르지 않겠다는 듯. 혹은 이제 그런 세상을 달리는 게 지겹다는 듯. 켈슨은 스파이크에게 더 빠른 속도를 내는 법, 좀비를 잘 죽이는 방법 대신 잘 떠나보내는 법,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잘 멈춰서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전달한다.
<28년 후>의 엔딩엔 영화적 허용으로 볼 수 있는 귀여운 비약 하나가 있다. 켈슨과의 만남 이후 홀로 길을 떠난 스파이크가 어느새 놀랍도록 빠른 존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스파이크는 분명 켈슨으로부터 어떤 전투 기술도 전수받은 적이 없다. 그가 배운 건 누구든 반드시 죽게 된다는 메멘토 모리라는 잠언뿐이다. 그런 스파이크가 어느덧 어엿한 전사가 되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게 이제 막 첫 번째 트로피를 들어 올린 유망한 루키 스파이크의 앞에 또 한 명의 베테랑인 지미(잭 오코넬)가 나타난다. 범상치 않은 속도를 뽐내는 지미의 목에 걸린 위아래 순서가 뒤집혀 있는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인다. 스파이크가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울타리 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파이크의 다음 달리기가 그 이유를 알려줄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