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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굥 Aug 30. 2020

아주 오래된 갈등

몰아붙이는 여자와 도망가는 남자


성향이 확연히 다른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 아빠는 비교적 차분하고 계획적인 편, 공격성보다는 수용성이 강한 사람. 엄마는 다혈질, 몸으로 부딪히는 편, 수용성보다는 공격성이 강한 사람. 두 분의 공통점은 '딸 바보'로 자식에게 희생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나 두 분의 다른 성향은 불통 야기했고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크나큰 갈등이 불거졌다.  


아빠는 5년 전, 거의 20년간 운영해오던 세탁소를 처분했다. 이유는 근처에 세탁편의점이 생겨서 적자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양복점을 거쳐 세탁소까지 한 가게의 사장님으로 불리며 수십 년간 자영업을 해왔던 아빠는 가게 처분 후, 자신의 기술을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아빠와 함께 일을 하다가 아빠의 가게 수입이 없다는 것을 진작에 인지하고 따로 나와서 일을 하셨다.


세탁소를 처분한 아빠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방황을 하고 있다. 새로 찾은 직장에서 가장 오래 버틴 기간이 고작 3-4개월이다. 거지 같은 사장님을 만나서 짤린 적도 있고, 월급을 제때 주지 않아 제 발로 나오신 적도 있다. 이쪽 업계가 공장에서 일하거나 대형 세탁소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보니 피고용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인데, 아빠는 운이 좋지 않게 개떡 같은 고용주를 만났던 것이다. (성향상으로 봤을 때도 가혹함을 견디는 역치가 엄마보다 낮았을 수도 있다.) 엄마 같은 경우에는 운이 좋게 의식이 깨어있는 사장님을 만나서 명절 때마다 떡값을 받고 사기 증진과 리프레쉬를 위해 정기적으로 워크숍을 가고 회식도 자주 했다. 하지만 호시절이 영원한 시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세금신고를 제때 하지 않아 세금폭탄을 맞아 사업규모를 유지할 수 없었던 사장님은 대부분의 직원을 내보냈고 엄마도 그 흐름에 따라 퇴직을 하시게 됐다. 직원에게 도리를 다하는 사장님은 엄마의 11년 치 근속에 대한 퇴직금도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결과적으로 아빠에 비해서 엄마는 꽤 행복한 직장 생활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엄마는 아주 간헐적으로 일을 해왔던, 현재는 백수인 아빠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아직 노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고, 결혼도 하지 않은 30대 초반 두 딸내미에게 손을 벌리기는 더더욱 싫기 때문에 몸 성할 때 열심히 벌어서 한 푼이라도 더 차곡차곡 모아 놓아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다. 아빠의 생각도 이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잦은 이직과 퇴직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지친 것이 사실이다. 개인 세탁소를 운영할 때랑은 다르게 손이 빨라야 하는 공장형 업무에 적응해야 하는데, 기존에 하던 업무 습관이 배어있어서 고용주를 만족시키기 힘들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직장에서 인정도 못 받고 퇴사하기 일쑤이고 자괴감이 커져가는 상태이다. 이러한 와중에 엄마의 구박과 압박은 은연중에 계속되고 있다. "당신은 왜 일을 안 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답답하게. 우리가 노후준비가 된 것도 아닌데! 여자 혼자 일하는 게 안쓰러워 보이지도 않아?" 엄마의 한풀이는 자식한테 까지도 이어져서 딸들에게도 서슴지 않고 아빠 욕을 한다. "집에만 있는 게 얼마나 게을러 보여. 아빠가 이제는 괴물로 보여 저러고만 있으니깐. 가게 할 때도 엄마가 다 벌어서 생활했는데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거냐고 몸도 성한 사람이."


엄마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같은 빌라에 사는 작은 이모의 눈에는 자신의 언니가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나를 호출해서 엄마와 아빠 사이의 곪아 있는 고름과 같은 갈등을 터뜨려서라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카페에 엄마, 이모, 나 셋이 모였을 때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아빠에 대한 엄마의 감정적 응어리와 원망은 예상보다 컸다. 그동안 엄마는 경제력이 부족한 남편과 함께 자식을 키우며 가정을 꾸리느라 뼈가 빠지게 고생을 했던 것이다. 이모와 나까지 아빠를 변호하며, "아빠의 단점을 경제력 부족하다는 것 하나밖에 없다. 억대 빚을 지거나 술 먹고 처자식을 패거나 바람을 펴서 가정을 파탄 냈던 사람도 아니고 단지 돈을 좀 못 벌었던 것일 뿐. 자식에게는 다정한 아빠이며 요리, 설거지도 잘하는 나름 가정적인 남편이다. 지금처럼 기죽이지 말고 아빠를 좀 인정해달라"고 엄마 앞에서 이야기하니 엄마는 그 자리에서 대폭발을 했다. 언제 나만 잘났다고 했냐면서. 엄마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건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편이 아니라 돈 벌어오는 남편인 것이다.


대폭발한 엄마를 보며 갈등의 깊이를 실감했고, 도저히 가족이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상의 끝에 부부상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취하는 동생이 집에 와서 네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동생과 나는 조심스럽게 부모님에게 부부상담을 권했다. 센터도 이미 알아본 상태였기 때문에 여러 정보를 공유하며 둘 사이에 상담이 필요한 이유도 덧붙였다. 하지만 엄마의 반발이 거셌다. 어쨌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아빠의 경제활동이고 아직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빠는 구직활동을 하는 동시에 수선집을 할 가게를 알아보고 계셨다. 엄마의 소원대로 다시 불안정한 자영업을 하기보다는 남 밑에서 일하는 게 안정적인 벌이에 도움이 되니 구직활동을 하고 계셨지만, 지난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성공적인 취직이 되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가게를 차릴 계획도 동시에 갖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는 눈에 보이는 아웃풋이 없으니 아빠가 집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린다고 생각했지만 아빠도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적어도 엄마는 아빠가 자신한테 무엇을 알아봤고, 일이 어떻게 되고 있고 상황에 대해서 업데이트를 듣고 싶어 했다. 그래야 답답함과 조급함이 조금은 덜 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행보를 아내에게 제대로 공유하거나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계획하고 협의하기 힘들었다. 아빠에게 신뢰를 잃은 엄마한테 얘기해봤자, 엄마는 타박만 하고 좋은 소리는 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혼생활 내내 지속됐던 문제였다. 아빠의 경제활동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소통 방법 개선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부부상담을 제안했으나 대차게 까인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취 생활을 마무리하고 거의 3개월 동안 부모님 집에서 살았는데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2가지 정도일 것 같다.


1. 부부 문제는 부부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해결되겠지~ 난 모르겠고, 모르겠다.

2. 아빠와 대화를 통해 진행상황을 업데이트받고 이걸 엄마에게 알리는 비둘기 역할 하기.  


1번을 택한다면 무관심에 속은 편할 수 있겠지만 부모님과 같이 사는 동거인으로서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력감이 들 수도 있다.  2번을 택한다면, 딸로서의 최선을 다해서 둘 사이의 관계 개선을 돕는다는 건데 그 과정에서 내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게 뻔하다. 비둘기 역할을 통해 엄마는 아빠의 노력하는 모습을 쉽게 전달받을 수 있어서 분노가 좀 누그러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엄마의 바람은 '아빠가 장기적으로 돈을 벌어오는 것'인 상황에서 결실이 아닌 노력하고 있는 과정만 전달하는 것이 과연 관계 개선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줄지는 알 수 없다. 난 아마 정확히 노선을 정하지 않은 채 1번과 2번 어느 사이 즈음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 만 같다.


그동안 부모님 간의 갈등이 내 삶에 크게 짐이 된 적은 없었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롤러코스터처럼 늘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했다. 순간 빽 소리를 지르며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가도 어느샌가 한 상에 둘러앉아 치킨을 뜯곤 했으니까 말이다. 누가 봐도 세상 가장 흔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도 아빠를 가장 위하고 안타까워하고 가장의 무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아빠 앞에서 살갑게 표현하지 않는 것뿐. 반대로 아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체감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한 번 더 도움닫기를 하여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만큼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10년 넘게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엄마 앞에서는 기가 죽어서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있진 못 하지만 말이다. 그 둘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는 너무나도 어렵겠지만 그래도 서로가 휘청거리고 있는 지금이 순간만큼은 자신 스스로가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은 어떨까. 엄마, 아빠도 비록 내가 아닌 타인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은 나라도 먼저 부모님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 보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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