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좋아하는 이유 ; 내가 나라서 너를 그렇게 보기 때문에
연인들끼리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A : 내가 어디가 좋아?
B : 넌 착하고, 다정하고, 외모가 귀여워서 좋아.
A : 그럼 내가 안 착하고, 안 다정하게 굴면 나 안 좋아할 거야?
B : 아니, 그건 아닌데...
진짜로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의 진짜 면모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나 자신조차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도, 내 행보의 모든 방향들을 예측할 수 없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그 사람의 속 깊은 일면들을 누가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겉으로 드러나는 속성들은 장점도 단점도 아닌 중립적인 면에 불과하다. 결국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해석한 상대방의 모습이 좋은 것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 든 말든 “내가” 그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나의 좋은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다 것은 ‘좋아하는 대상으로 보기’를 멈춘 것이다.
남몰래 흠모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물론 오롯이 나의 기준에서 말이다.
확고한 현재를 사는 사람은 언제나 섹시해
직장 동료인 N의 이혼 소식을 알았을 때, 그녀의 나이는 29살이었다. 태국 방콕으로 떠난 워크숍에서 팀빌딩을 땡땡이친 우리는 여유 시간이 아주 많았다. 뜨거운 날씨를 피해 호텔 1층에 있는 펍에 들어가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 태국에는 트랜스젠더가 많을까?’하는 의문을 시작으로 19금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전 남자 친구, 아니 전남편 이야기는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결혼 앞두고 예비신랑의 판도라의 상자, 카카오톡 대화를 보게 된 후 그가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망나니 같은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본인을 포함한 부모님도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모두 돌린 상태, 결혼식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고 결혼 직후부터 이혼 소송에 들어간다.
그 당시 그녀는 모든 이혼 절차를 끝마친 상태였고, 남자 친구도 있었다.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진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이혼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남자에게서, 잠시 잠깐 동안이지만 남편이라는 존재에게서 쓴맛을 본 후, 다시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깊이 있게 다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언젠가 한 번 그녀에게 이런 나의 의문을 내비친 적이 있다. 그녀는 대답 역시 나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것. 과거의 거지 같았던 기억을 현재에 연결시켜 현재의 연애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묻어둔 채 오롯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마치 잘려 나간 꼬리를 뒤로 하고 앞으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도마뱀 같았다.
인생에 대한 내공이 상당하다고 느껴왔는데 그런 내공은 역시 그냥 쌓이는 게 아니라 모진 풍파를 겪은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단단함이었다. 그녀는 한 마디로 똑똑하다. 똑똑하기 때문에 지금도 후회가 남지 않기 위해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중이다. 보통 주변의 애인이 있는 여자 사람들은 남자 친구와 어떤 데이트를 하고 어디를 갔다 왔다던가, 남자 친구에게 받은 것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친구는 남자 친구에게 해준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명절이나 남자 친구 가족의 대소사에 선물을 챙기는 것은 물론, 회식도 마다하고 갑작스럽게 연차를 쓰고 남자 친구 일 도와주러 가는 등 부지런히 남자 친구를 위해준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매일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절대로 욕먹을 짓을 하지 않는다. 본인이 큰소리치기 위해 웬만한 실수는 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본인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기 때문에 회사의 불만스러운 부분에 목소리를 내도 용납이 된다.
그녀의 확고함이 좋다. 결단을 쉬이 내리지 못하고 때로는 걱정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늘 또렷하다. 대화 속에서 나의 잡 걱정들이 아무것도 아닌 웃음거리로 변하는 순간이 좋다. 인생은 꽤 단순해 때로는 긴 숙고 없이 본능이 이끄는 선택이 옳은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늘 나의 직관을 지지해준다. 그렇게 힘이 실린 작은 배는 순항한다. 순항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선착장에 매여 있지 않고, 어디로든 간다.
나이는 결국 숫자에 불과해. 젊었을 때 멋있었던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멋있는 법이지.
특정 나이 대를 떠올려 봤을 때, 사회적 인식과 그동안의 경험에 따라 그 나이 대 사람들이 흔히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 패턴을 을 예상할 수 있다. 50세. 누가 들어도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한 회사의 지사장, 이라면 응당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라는 예측을 하게 되는데, 내가 봐왔던 그는 보기 좋게 그야말로 훌륭하게 나의 예상을 비껴간다. 상사로서 나이쯤 되면 아랫사람을 부리기에 급급하지 본인이 두 발 벗고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거나, 나아가 그것을 회사의 큰 발전으로 이끄는 경우는 많지 않다. 회사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사 업무에 필요한 공부를 하려고 주말마다 5시간씩 연강을 듣기도 쉽지 않고, 직원들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독려하면서 사비로 교재를 사주는 상사는 흔하지 않다. 또한 가정에서는 어떤가. 수험생 아들의 학원 픽업을 도맡아 하고,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와이프와 함께 손목에 타투를 새기는 남자라니. 여러 방면에서 그는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어른'이었다. '꿇으라면 꿇어'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으로 전달하며 대접을 바라는 소위 꼰대가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그에 걸맞은 행동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그런 어른 말이다.
일을 제외한 영역에서 그는 아빠 같았다. 어쩌면 아빠보다 더 스윗했을지도. 쓰레기통을 대신 비워주는 것은 물론 내 책상이 더럽다며 정리를 해주기도 하고, 내가 이별을 했을 때는 또 헤어졌냐며 에픽하이의 헤픈엔딩을 틀어주며 날 놀렸다. 배가 고프다며 찡찡대는 우리를 위해 직접 고고씽을 타고 가서 떡볶이를 사 오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캐롤을 틀어 연말 분위기를 북돋았다. 나보다 20년을 더 살아본 사람답게 인생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 바닥에서는 '석사 졸'이라는 학위보다 실무적인 능력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것. 일은 충분히 열심히 했으니 쉴 때만큼을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맘껏 쉬어도 된다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외모를 치장하는 나에게 이미 외모는 충분히 괜찮으니, 너만의 개성 있는 가치관을 만들라는 것 등등등. 한 번씩은 더 곱씹어봐도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평소에 이렇게 따스한 사람이 일할 때는 어쩜 그렇게 철두철미한지. 한 회사의 지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한국 지사라는 한 가정을 잘 꾸려내기 위해 그는 책상에 앉아서만 일하지 않고 책상 밖에서도 끊임없이 일을 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여유가 느껴지던 이유가 있었다. 이미 플랜 b를 넘어선 플랜 c, d, e까지 머릿속에 설계를 해놨기 때문에 예상 밖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본인이 예상 답안으로 만들어놨던 카드를 꺼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미팅에서 그가 했던 날카로운 질문들에 얼마나 쫄았는지 모른다. 내가 왜 이걸 모를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 앞에서 무지를 들킨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회의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은 물론, 항상 일을 더 깊이 있게 하려고 하고 노력하고, 긴장을 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드는 것이 두려웠다. 나이에 따른 제약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무언가 도전해서 실패한다고 했을 때 벌어지는 리스크는 감당하기 점점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안정감을 추구함에 따라 새로움, 변화, 도전과는 멀어지고, 내 것을 고수하려고만 하다 보니 그 밖의 것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뻣뻣한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나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내가 편견을 깨부숴주는 사람을 만났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열려 있고, 유연하고, 여전히 능력치 만렙에 그렇지만 겸손한 사람.
50대에 멋있는 어른의 표본을 보여준 그는 20대, 30대에도 멋진 사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