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굥 Aug 16. 2019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

몇몇 사람들로 인해 인류애가 사라진다.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에 나와 다른 인간사를 가진 개개별 인간들의 특성에 호기심이 많다. 나이, 성별, 직급 등 한 사람이 가진 타이틀과는 관계없이 사람을 인격체 그 자체로 대하는 편이고, 일부러 나를 꾸미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며 다가가곤 한다. 사람들에게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갔고, 그러면 고맙게도 상대방 역시 나를 편한 사람으로 대해주었다.


이렇게 30년간 살다 보니 내 나름대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구축되어 갔다. 솔직하게 편하게 좋게 생각하는 것. 또래에게는 비교적 좋은 평판을 얻는 편이지만, 관료주의 성향이 강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려야 하는 조직 속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에게 크게 데인 적도 없고,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 사람은 나랑 인연이 아니었거니 하면서 금방 잊는 스타일이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별로 없었다.


올해는 다르다. 본격적으로 인간관계에서 대해서 아주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상처를 받기도,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하며 골 머리를 싸매기도, 내가 그동안 인간을 대했던 태도가 잘못된 건지 되돌아보기도 한다. 가끔 그것 때문에 잠도 안 올 지경이다.


무엇이 나를 괴롭히는가?


1.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못 견디는 부분은 사람의 일면만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나의 가치관과 상충된다. 인간에게 관대한 편이라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한 인간이 가진 두드러진 특성은 '개성'으로 간주하곤 한다. 인간은 공장에서 찍어 나온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규격화'되어 있지 않음이 당연하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관점에서 바르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가진 '다름'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하다. 인간을 좋게만 생각하려는 게 남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래, 그 또한 그 사람들의 개성이고, 일면에 불과할 테니까.

 

"이 사람 별로야, 이상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근데 딱히 그 사람이 피해를 주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까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건 오답이다. 나의 솔직한 생각을 말해봤자 "내가 사람 싫어한다고 말하는 건 내 자유 아니야?", "왜 넌 이렇게 공감을 못 해줘?"라는 타박을 듣기 마련이다. 지금은 적어도 그런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동조하는 리액션을 보이곤 한다. 알다시피 이것은 처세에 불과하고, 마음속으로는 그런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된다. 그 사람은 분명 나를 타깃으로 둔 채 자신만의 각도기로 이리저리 재어봤음이 분명하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인물과 내가 잘 맞는지 아닌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인간의 단점 (객관적인 척하는 주관적인)을 끄집어내고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 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2. 내겐 너무나도 오만한 너  


기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규정하고 평가 내리는 건 너무나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앞에서 '너는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낙인을 찍는 사람이 있다. 마치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30년 이상 나를 데리고 산 나 자신조차도 나를 정의 내리기 힘든데 말이다.


나아가서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인간을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오만하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은 변화를 꾀하고 싶어도 특별한 의지나 추진력이 없어서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오래 못 가고 찔끔찔끔하다 만다. B는 본인이 필요성을 못 느껴 해외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여권조차 없다. C는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사 먹는 사람으로, 집에 그 흔한 칼이나 가위 같은 가재도구가 없다. 내가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A에게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너도 한 번 해봐. 끈기 있게"라며 무언가를 시도해보라고 강요할 수 없다. B에게 "젊을 때의 여행은 많은 가르침을 준다"며 여권을 만들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강요할 수 없다. C에게 "집에서 해 먹어야 건강도 챙기고 돈도 아낄 수 있다"며 요리 해 먹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을 하고 하지 않는대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그것은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봤자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입만 아프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도움이나 조언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남의 인생에 훈수 두는 일은 지양하는 게 건강한 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3. 편한 거니, 만만한 거니


위에서 언급했 듯 사람들을 편하게 대하고 수더분하게 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가끔씩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막말을 시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람들 말에 크게 예민하게 구는 편도 아니고, 그냥 이런 인간도 있겠거니 하면서 넘기는 편인데 가끔은 어떤 말들은 폐부를 찌른다.


직장 동료 한 명이 성형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와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내 앞에 앉은 한 부장님이 내 이름은 부르며 "00씨는 코 수술 안 해요? 해야 할 것 같은데..."라며 허허 웃으셨다. 순간 기분이 더러웠으나 썩소를 지으며 별 다른 대꾸를 안 했다. 그때는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넘겼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 기분이 나빴다. 이건 백번 양보해도 상대방이 무례한 경우였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상황에서 뭐 어쩌겠나. 다음번에 비슷한 경우를 맞닥뜨렸을 때, 한 방 날릴 예정이다. 솔직과 무례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어쨌든 내가 들었을 때 도를 넘은 불쾌감이 든다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무례'다. 무례한 말 앞에서까지 참고 넘긴다면 그것은 편한 사람을 넘어 만만한 사람을 자처하는 일이다.


어차피 스쳐갈 관계라면 가볍게, 인연은 소중히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 어느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한 번 더 검열하고 주의하게 만든다. 즉, 나 자신도 상대방도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작위적으로 행동하게 될 가능성을 뜻한다. 상대방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가면을 쓰기도 하고, 아주 편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느 정도의 벽을 세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저 편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추구해왔던 나에게는 이러한 방식은 어딘가 어색하게 다가온다.


인간의 개성과 다름을 존중하는 사람답게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좋아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내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 듯 남들도 나에게 모두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류애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껴안고 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나의 포용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나 자신이 조금은 싫어졌던 것 같다.


타인의 '좋은 면'을 보는 성향을 굳이 버리고 싶진 않다.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쓰는 에너지가 나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바꿀 수도 없다. 다만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스트레스 또는 상처를 주는 사람까지 가까이에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을 취사선택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나와 맞는 사람이라면, 인연이라면 곁에 남기 마련이다. 뻔한 말이겠지만 진리이다. 스쳐갈 사람으로 인해 감적 소모하지 않기를. 인간관계에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30대 연애, 또 한 번 사랑은 가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