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The New Destiny
레몬에이드는 레몬색이어야 하는데, 한 때 블루 레몬에이드가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레몬맛이 나는데도 왜 파란색인지, 사람들이 왜 5천원씩이나 주고 사먹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맛도 없는 음료를 셀 수 없이 마신 이유는 명확하게 알고있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음료였다. 처음 그 유행에 동참했을때, 만나던 오빠의 반응이 좋아 나도 모르게 공감해주었을 뿐이었는데, 그 후 1년을 블루 레몬에이드 많이 좋아하는 여자로 살아야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저 오늘은 아이스티 마실래요" 한마디면 됐는데 그걸 못했다.
퇴근 후 데리러온다는 말에 신이나서 서둘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는데, 오빠의 양손에 들린 파란색깔 레몬에이드를 보고 실망한 순간이 몇번이었을까. 그러고선 내가 "실망감"을 느꼈다고 인정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별 후, 파란색깔 레몬에이드를 파는 가게에 우연히 갔다가 자연스레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을때 비로소 알아차렸다. 레몬에이드 안 좋아한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속이며 1년을 살았구나. 그리고 인도에 갈 즈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했던 다른 무언가가 내 뒷통수를 쳤다.
파란 색깔 레몬에이드를 좋아해야 내가 사랑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구나. 그렇게 나는 사랑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내가 레몬에이드가 아닌, 다른 음료를 마시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거야..
사랑을 번다..라는 논리는 내 주변 다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가 좋은 대학 다니니까 자랑스러운 딸로 사랑받는거야. 걔 내가 저번에 커피사준 후밴데, 역시 날 좋아하네. 내가 기를 쓰고 앞자리에 앉아서 강의 듣는데 교수님이 날 미워할리가 있나. 내 친구들은 나 처럼 나서서 금요일밤을 계획할 사람이 필요하고, 역시 난 없어서는 안될 존재겠지.
세상 모든이가 좋은 딸, 좋은 친구, 좋은 선배 또는 후배, 좋은 학생, 훌륭한 직원 등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큰 죄는 나의 행복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파란색 레몬에이드를 건네 받아 한 모금 들이키며 정말 그 여름날 더위를 물리칠 수 있었는가? 친구들과의 여행계획을 혼자 짜면서 행복했는가? 아니면 희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이 아니라면 사랑받을 방법이 없다 싶어서 계속 나를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는가. 정말 돈처럼, 성적처럼, 사랑이 버는 것이라면 이 세상이 얼마나 치욕스러울까 생각하다가, 사랑을 벌고 있던, 아니. 벌고 있다고 믿었던 나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외로웠나 생각해보았다.
인도에서는 어떤 결정이던 "좋은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좋은 마음은 참 단순한고도 알아차리기 힘든데, 하나의 질문에 백퍼센트 솔직할 수 있다면 간단하다. "내가 이 일을 하기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겉으로 희생처럼 보인다고 해도, 내가 좋은 마음으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아닌, 상대 중심적인 생각으로 움직이면 "희생" 이라는 단어조차 그 힘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보통 남의 시선때문에 나에게 던지는 저 초간단한 질문을 꺼내지조차 못한다.
헤어질때까지도 그 남자는 내가 파란색 레몬에이드를 좋아하는줄 알았을거다. 다시 얘기하면, 헤어지는 이유엔 파란색 레몬에이드 따위는 포함되지도 못했을 만큼 가치가 없었다는거다. 아, 입맛에 맞지 않는 것에 들어간 경제적 손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