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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Kim Dec 16. 2016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언젠가 마주 할 삶의 마지막 순간이 죽음이다.


누구나 죽음과 동시에 이 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가 끝난다.


죽음에 대한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세속적이고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비극적 관점, 죽음 후의 천국 등을 설정하는 종교적 관점, 불교에서 깨달음이나 열반등으로 제시되는 초월적 관점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도 있다. 죽음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는 것이다.


과장되지도 그렇다고 축소 되지도 않은 어떤 감동이나 감정을 불필요하게 강조하거나 일으키지도 않으면서도 최대한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특별히 우리는 타문화권이라는 세계에서 특별한 임무로 바쁜 시간과 생활로 생계와 경쟁에 쫓겨 Burnout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상태까지 와 버린 자신을 알아차리지도 못한채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돌봄은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피로한 공동체 혹은 위험수위에 도달한 사회에서 돌봄은 사치스러운 건가?


우리 주변에 그런 피로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아무도 곪아터진 상처의 회를 뽑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린 언제부터 스스로 교만 가운데 잘난체를 보였을까? 아니면 너무 보고에 쫓긴 삶을 살았나? 아니면 누구도 쉽게 근접할 수 없는 대드라인을 긋고 살았나?


말 못할 벽을 쌓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영웅들의 모습이 한없이 서글퍼 보인다.


인간답게 오손도손 나누며 부족함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살 순 없는걸까? 그런 공동체를 꿈꾸면 안되는건가?


꿈같은 공동체를 부러워하는 무리들에게 무언의 복음은 전달 될 수 없는 건가?


어디로 달려가는 걸까? 어느 한 순간부터 견제하게 되었고, 또 마음 맞는 사람이 편하게 느껴진걸까?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고대하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고 있다. 특별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때를 살고 있다. 그래서 목적이 같고 뜻이 같기 때문에 생사를 같이 하기에 충분한 동지이다.


동질감이 '우리'라고 불리우게 했다.


타문화권의 삶이 삶과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의 울타리를 치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무관심은 온전한 제자의 삶이 아니다. 무관심이 존재하는 공동체는 공동체라 말 할 수 없다.


이번 주 내내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마음을 열어 감싸주지 못하고 지내왔던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이 갑작스런 어떤 죽음으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념을 달리한 사상가나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리고 좀 편안하지 않은 의자이지만 마주보며 앉아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동지들이 아닌가...각성하자


동지의 이름으로....지란지교芝蘭之交를 소망하며 친구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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