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트발, ‘내 몸의 소리’를 천천히 따라가면, ‘아저씨' 소리는 절로..
9월이 되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입니다.
담박하게 입던 반팔셔츠는 이제 잘 접어 보관하시고,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매끈하며 밀치(密緻)한 수트발을 살릴 시기가 왔습니다.
아직도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굳이 ‘슈트’ 라고 어렵게 발음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제 담백하게 ‘수트’ 라고 편하게 발음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언중의 소리를 따라서 조만간 <표준국어대사전>에 ‘수트’가 다시 표제어로 등재되어야 할 것 입니다.
수트(suit)라는 영어 단어는 ‘한 벌 양복’ 이라는 명사일 뿐만 아니라, ‘적합하다’,
‘맞추어 가다’, ‘적응하다’ 라는 뜻의 동사도 됩니다.
Suit yourself!
기억하시죠?
‘수트’라는 명사가 ‘
상하 한 벌’이라는 의복의 정(靜)적인 형식을 표현하고 있다면,
반면
동사 ‘수트’ 는 동(動)적인 시간의 흐름 위에서,
몸과 수트 간에 벌어지는 상호 역학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는 ‘수트 맵시’는 결국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일단 몸에 꼭 잘 맞는 것을 입어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명사적 ‘수트’).
이것을 기반으로 때때로 계절에 따라 그것을 함께 입어내면서,
그것이 내 몸을 타고 흐르게 하는 것이 수트 맵시의 심화 과정이 될 것 입니다(동사적 ‘수트’).
이 둘 중에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동사입니다.
어원적으로 수트는, 라틴어 sequi (이탈리아어 seguire) 에서 왔습니다.
‘sequi’는 ‘잘 맞다’ 가 아닌 ‘따르다’ 라는 뜻입니다.
몸에 맞는 옷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그 토대 위에, 도톰하고 짱짱하게 잘 지어진 수트가 시간에 따라 숙성되며,
내 몸을 천천히 따르게 하는 것이 바로 수트의 본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간단하게 ‘맞는 옷’을 찾는 기본 과정을 살짝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몇 년 전까지 한국에서는 중저가의 맞춤양복 시장이 꽤 선풍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현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어깨에 ‘로봇각’이 만들어지는 것을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대다수 직장인들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한국의 수트 문화를 극복하는 사회적 진화 과정이었다, 라고요.
다만, 맞춤복도 물론 좋지만 동시에 여전히 좋은 가성비를 가진
기성복 수트의 탐색도 포기하시지 말라는 포인트 하나만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기성복이라고 모두 직각 어깨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별로 자켓과 바지의 원형 패턴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미세한 차이를 백화점에 지나가다가 슬쩍 입어보고 몸으로 느껴보시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경험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표준 체형에서 지나치게 멀어진 체형이 아니라면,
오히려 기성복 컬렉션이 투입된 시간 대비 디자인의 스펙트럼과 신규성,
그리고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 비교적 수월한 선택이 가능한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수트의 개별적 숙성과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수트는 홑겹의 셔츠, 얇은 점퍼 류 등과는 달리, 자체의 패턴과 소재, 그리고 내부보강재를 통해서,
사람이 입었을 때 만드는 3차원 형상까지 설계되어 만들어져 나옵니다.
마치 하나의 가죽 구두와 같습니다.
잘 만든 가죽 구두의 모양은
가죽의 내구성과 패턴 구성에 의해 쉽사리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중력을 견뎌내며 발의 모양을 타고 서서히 변합니다.
수트 역시 소재 자체의 특성, 패턴과 봉제, 내부보강재에 의해, 한 번에 무너지지 않고,
처음 구성된 원형에서 차츰 입는 사람의 몸을 타고 변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다른 예외적 장력 또는
국지적으로 불필요한 긴장없이 중력과 내 몸에 따라 변하면서,
그 과정에서 몸에 맞게 맵시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수트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내 몸타기’를 위해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끼느냐! 푸느냐! 그것이 문제.
일반적으로 수트 자켓을 분류하는 쉬운
기준으로 싱글과 더블이 있습니다.
싱글은 중고생들 교복자켓과 같이 앞여밈이 심플한 자켓입니다.
이 경우 앞여밈이 한 점 또는 하나의 선으로 구성됩니다.
반면, 더블은 (저는 왜인지 탤런트 차인표가 연상됩니다.) 앞 복부쪽의 두개 판이 겹쳐진 결과,
앞여밈 모습이 하나의 면으로 구성되는 자켓입니다.
이에 대해
일부 댄디 잡지
패션 에디터
(기자)들은
기사나 패션잡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음의 정보를 센스의
규범처럼 퍼뜨립니다
싱글 자켓의 경우, 설 때는 꼭 잠가라,
반면 앉을 때는 꼭 앞을 열고 앉아라 ! '
'더블 자켓의 경우는 위의 단추 하나만 오픈 ! '
'쓰리 버튼의 경우는 가운데만 닫아라!’
이런 구체적 지침을 마치 미학적으로 공증받은 카논(canon)처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이것은 지나치게 지엽적이고, 그 안에 내재된 기본원리가 잘 읽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때때로 이런 글을 접하셨던 대다수 남성분들은 ‘내 옷인데 내 맘대로~.’ 하고 쓱 넘어가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것이 제가 이 글을 쓰고 이유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댄디 젠틀맨들의 지침을 굳이 거스르지 않으면서,
간단하게 다음의 두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단 하나의 원칙
수트 자켓은 잠가야 제 맛!
그것도 단추 하나로 !
자켓은 구두처럼 3차원의 입체를 만들어야 궁극적 미감이 완성되는 의복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하나의 버튼은 끼워져야 상체를 감싸는 구성이 닫히게 되고,
그 결과 입체감이 완성됩니다.
결국 싱글 자켓이던, 더블이던,
입체를 만들기 위해 적어도 하나의 버튼은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의 버튼만을 채우는 것이,
보다 여유로운 상태에서 몸을 타고 흐르는 곡선이 형성되어
미학적으로 높게 평가됩니다.
다만, 하체와 상체가 일정한 둔각을 형성하며 앉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특히 싱글 자켓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이 입체를 푸는 것이
적절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 당연히 풀어야 할 단추가 하나인 것이 둘 보다 편하고,
시간상으로 앉으며 한 손으로 단추를 푸는 손 동작면에서도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 원칙에 대한 단 하나의 예외 :
싱글 자켓은
(웬만하면)
열면서 앉을 것 !
그이유는
미학적 범주를
넘어갑니다.
윗 그림처럼 앞여밈 채 앉게 되면,
싱글 자켓의 닫힌
하나의 버튼만
과도한 힘을 받아
옷이 매우 힘들어 합니다.
그 결과 버튼을 관통하며 직물과 버튼을 잇고 있는 실 다발
역시 점점 헐렁해 지게 됩니다.
단추를 묶고 있는 실을 당긴 그 힘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죠. 결국 자켓 안에서 어깨, 등, 옆구리의 패턴, 즉 자켓의 판들이 각자 자기 몫으로 당기고 있는 것 입니다.
이 상태를 피해야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이유입니다. 자켓의 고유한 형태를 벗어서는 과도한 힘이 가해져 소재와 형태에 옷이 애초에 의도치 않은 왜곡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랫배가 불뚝 나온 결과, 앉은 상태 만큼이나 서 있는
상황에서도 옷과 몸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어 있는 경우,
비록 댄디에디터들의 지침이 ‘스탠딩 시 무조건 클로즈드 ! ’
라고 외쳐도, 슬쩍 열어두시는 것을 저는 추천 드립니다.
결국 내가 편해야, 남도 나를 자연스럽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반면, 더블 자켓의 경우는 싱글과는 달리,
다시 원칙대로 돌아갑니다.
즉, 앉게 되는 경우에도 무리가 없다면,
원버튼 잠금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이 경우,
복부에
겹쳐지는
두 판의 옷감이
앞판의 긴장을 분산하는 버퍼 역할을 하고,
상위 라인에
안쪽으로 숨겨진 또 하나의 버튼이
힘을 분산합니다.
또한 보통 더블 자켓에서 잠금이 이루어 지는
위쪽 버튼의 경우, 싱글보다는 조금 위쪽에 위치하는데,
이 부분은 싱글 자켓의 버튼 보다는, 신체구조 상 앉을 때 덜 벌어지게 되어 부담이 덜하게 됩니다.
즉 더불의 경우는 앉아 있을 때에도
몸에 무리가 없다면,
그대로 잠그고 앉는 것이 좋습니다.
더블 자켓으로 서 있는 경우에, 위 아래 단추를 모두를 잠가도 큰 잘못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맵시가 떨어집니다.
보통 아랫 단추를 열어두는 것이 더블의 무거운 격식미 안에 작은 숨구멍을 주면서,
좀 더 온화하고 조화로운 감성을 불어 넣습니다.
즉, 더블의 경우 앉으나 서나, ’윗쪽 하나만 잠금.’이 결론입니다.
결론을 종합하면,
위 사진의 자켓을 입은 (딱 봐도 피띠) 댄디들이
싱글, 더블 자켓을 막론하고, 하나의 버튼만 잠근 것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언버튼으로 오픈된 자켓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몸 탄 수트로 탈 아저씨' 주제와 관련하여 한가지만 더 첨언을 드리며 저는 물러갑니다.
이탈리아에서 좀처럼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몇몇 한국 회사에서는
가끔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켓을 위해서, 그리고 본인을 위해서
의자에 옷걸이라는 용도를 하나 더 부여하시는 일은 이제부터 자제하시는 것이 내 몸과 같이
풍화하고 있는 수트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다음 달에는 밑으로 내려와 수트와 어울리는 슈즈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Postscriptum
9월 17일부터 21일 까지 밀라노 Rho fiera 에서 세계 최대 슈즈페어 MICAM 에 갑니다.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에도 2회 연속 EMERGING DESIGNER 로 초대받아, 다음 시즌
새로운 슈즈 디자인을 선보이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밀라노 갈 생각에, 가슴이 뛰네요.
10년전 제가 그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처럼.
IELMANO YOON
JIMIBEK MILANO 대표/디자이너
JIMIBEK.IT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