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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레 Oct 25. 2024

김장하면 자동 완성되는 우쿨렐레

동네 낮을 지키는 사람들

하루 세시간을 대중교통에서 보내던 광역통근러로 12년을 살고 동네생활자로 전향한지 3년차.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 멋쩍게 웃으며 “놉니다”라고 대답한다. 밥벌이를 하는 생계수단이 현재로는 없고, 잊어버릴 때쯤 나타나는 아르바이트로 소소한 용돈 벌기를 하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논다는 내 대답에는 대체로 부럽다는 감탄과 함께 "뭘 하고 노냐"는 질문이 이어지는데, 그땐 그냥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고 답한다. 앞으로 먹고 살 무언가를 찾길 바라는 막연한 바람과 함께. 이 시리즈는 그 동네에서 배운다는 이것저것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사교육 애호가다. 학창시절엔 흔하게들 학원과 과외를 다닌다지만 회사원이 된 이후에도 각종 사설 클래스나 문화센터 강의, 유명 인사의 강의, 북토크 등을 좇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갓생을 사는 자기계발 광인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무언가 생산적인 걸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엔 강의 수강만큼 손쉬운 것도 없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넘쳐나는 것은 시간이었기에 잡다한 관심사들을 충족시켜줄 수업들을 찾아다녔다. 거기서 발견한 것이 바로 동사무소의 강좌!(요즘은 행정복지센터라고 한다지만 사실 내 기준엔 동사무소가 제일 정겹다.) 역시 사교육의 나라답게 백화점이나 마트 뿐 아니라 동사무소에서도 각종 사교육을 제공하는데, 우쿨렐레 강좌가 3개월에 무려 4만 5천원! 파격적인 가격에 혼미해져 온라인 신청이 끝났다는 걸 보고 동사무소로 달려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남편이 한번씩 “언제 버릴꺼야?”를 시전하던 우쿨렐레 존재의 의미를 드디어 찾을 수 있고, 음미체의 삶을 추구하고 싶었던 나의 이상향에도 맞닿아 있는 취미 우쿨렐레. 먼지가 뽀얗게 앉은 케이스를 몇 년 만에 닦아 메고는 ‘나 쫌 음악하는 사람 같아’라는 말도 안되는 자아도취에 빠져 동사무소로 향했다. 강의실 문을 여는 순간, 아~ 집에 가고 싶었다. 방심했다.



평일 오전 11시, 동네에서 우쿨렐레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자녀들도 모두 사회로 나간 어머님들 혹은 퇴직한 아버님이라는 사실을. 우쿨렐레 선생님 또한 50대 초반, 비록 회사에서는 연차가 어느 정도 찬 30대 후반이었지만 그래도 이십년 차이 나는 같은 반 친구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계산이 안 서는 내향인이었다. 게다가 활짝 웃으며 앞으로 앉으라는 선생님의 친절한 대응에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업시작과 함께 주어지는 두툼한 우쿨렐레 교제. 더불어 오늘 수업이 끝나면 4곡은 연주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하는 선생님의 기세에 그렇다면 이렇게 된 거 배워보자 싶었다. 시작은 가장 기초적인 C, F, C7 코드 익히기. 코드 운지를 가르쳐주더니 냅다 노래를 불러보자는 선생님. 우쿨렐레를 들쳐메고 수강생들 사이를 돌며 더 크게 노래 부르라고 호응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몸짓에 박자를 맞춰 코드 2~3개를 어찌어찌 손가락 바꿔가며 치니 어느 새 동요 ‘올챙이와 개구리’(올챙이 뒷다리가 쑤욱~ 나오는 그 노래다)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 가요까지 첫날에 연주하게 된다. 사실은 입이 부르는 노래가 우쿨렐레 소리를 대신해 연주를 완성했다.


아! 말려 버렸다. 호기롭게 4곡은 완성할 수 있다고 했던 선생님의 말에 설마했지만 크게 부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 돼 버렸고 다음 시간까지 교제비를 입금하라는 이야기까지 잊지 않으셨다. 교재가 없으면 수업이 안되고, 수업 중간중간 악보 어느 부분에 필기하라고 이야기 하며 체크까지 하는 선생님이었다. 그야말로 낙장불입이랄까 ㅎㅎ


내향인인 내게는 수업 참석자체가 큰 도전이었으나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교재비를 포함한다고 해도 꽤나 저렴한 가격의 수업인 것은 분명했고, 수강생 연령이 높아 A-Z까지가 아니라 A부터 A’, A’’까지 정말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줬다. 박치인 나도 몸에 익을 정도로 반복해 스트로크를 알려 주었고, 우쿨렐레로 박자를 연주하기 전 몸부터 리듬을 익숙해지는 법을 배웠다.


한번은 박자 맞추기가 어렵다며 하소연하는 어머님과 2인 1조로 연습하게 됐다. 선생님은 젊은 사람(나)이 선생님을 대신 해 옆에서 잘 봐 드리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수업은 초급과 중급이 섞인 20명의 수강생이 뒤섞여 있었기에 서로의 편의를 봐주며 하자는 노련한 선생님의 대처가 돋보였다. 엉겁결에 역할을 받았으니 어쨋든 어머님 옆에서 상체 바운스로 강약중강약을 세며 박자를 맞춰 나갔다. 그렇게 연거푸 연습하다 보니 드디어 어머님도 박자 맞추기에 성공했다. 수업이 끝난 뒤 어머님은 내 허벅지를 꽉 잡으며 “덕분에 할 수 있었어. 고마워요” 강렬하게 감사를 전하셨다.


‘오히려 좋아, 아니 좋을지도 몰라’를 외치며 꾹 참고 수업을 이어가던 몇 주가 지나고 항마력이 딸리는 순간이 도래했다. 수업을 듣던 시기는 10~12월, 또다른 말로는 김장철이었다. 어머님들은 하나 둘 각자의 김장 스케줄을 공유했고, 파티를 기획하게 된다. 한 어머님이 이민을 가신다고 하니 김장 김치와 수육을 가져와 송별회를 하자고 말이다. 그 이야기에 손주의 등학교를 책임지는 몇몇 어머니는 난색을 표했고, 선생님은 굴하지 않고 그럼 수업을 일찍 시작해 오후 1시 전에는 송별회를 끝내주겠다 단언했다. 수업은 1시간 당겨 진행하고, 송별회는 선생님이 아는 가게를 빌리겠다며.


엄청난 추진력과 기획력에 화들짝 놀란 내향인은 그 수업에는 나갈 수 없었다. 모임장소 였던 ‘○○○ 7080’이라는 가게 이름부터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 이후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른팔에 금이 가는 사건이 생기면서 수업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날의 흥겨움을 담은 단톡방에는 계획했던 김장김치와 보쌈이 있고, 우쿨렐레를 곁들인 노래 자랑도 있었다. 술 또한 빠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강렬한 추억과 함께 결국 우쿨렐레는 다시 먼지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래도 그 때 만났던 어머님, 아버님은 옆 동네 어느 축제에서 노래인지 연주인지 우쿨렐레를 어깨에 매고 무대에 서실 것 같다. 당시에도 선생님의 열정으로 수강 기간 내 두 번의 동네 무대에 섰었으니 말이다. 비록 나와는 맞지 않는 버거운 텐션이 어려웠지만, 일상의 시간을 쪼개서 즐겁게 살고 계신 그 분들이 여전히 건강하고 흥겹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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