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Thaumazein
이전 글 (무식하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은 비확실성, 무질서, 우연성, 혼돈과 같은 놀라움의 영역이 왜 필연적이고 우리에게 필요한지에 대해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 글이다. 이번에는 “놀라움”에 대해 리서치 하던 중 철학적 시각을 발견하고 정리해보았다.
“철학은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 플라톤
플라톤은 “철학의 시작”을 놀라움, 경이(Thaumazein)로 정의했다. 그는 『테아이토스』에서 “놀라는 감정이야말로 철학자의 특징이며, 이것 (놀라움) 말고 철학의 다른 출발점은 없다.”는 말을 했다. 이러한 철학의 시작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동의했는데, 그는 『형이상학』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통해서 철학을 시작한다”라고 얘기했다.
놀라움이란 무엇일까? 놀라움은 급작스럽게 내게 다가온 무언가 이다. 더 정확히는 급작스럽게 다가온 무언가 때문에 움직인 내 마음 상태일 것이다. 놀라움은 내가 예상, 고려,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 따른 내 감정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놀라움은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될 수 있다. 수학자 클로드 샤넌은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놀라움을 엔트로피(entropy)로 표현할 것이고, 리스크 분야의 권위자인 나심 탈레브는 무질서, 불확실성, 다양성, 불완전한 지식, 우연, 혼란, 가변성 등의 단어들로 표현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시작을 논하면서, “놀라움은 난관(Aporia)에 부딪힐 때 생겨나는데,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철학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난관을 통해 무지함을 먼저 발견하고, 그 무지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곧 철학인 것이다. 여기서 난관(Aporia)은 “길”을 뜻하는 Poros와 부정 접두어인 A가 조합된 단어로, “‘길이 없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길이 없어져, 스스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철학의 시작이고, 가야 할 방향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인 것이다. 내게 익숙했던 것이 사라질 때, 또는 다른 무언가에 의해 익숙했던 것이 변화되었을 때 우리는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철학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멋진 관점이다. 막다른 길의 지점은 놀라움, 불안, 절망, 고통인 것과 동시에 혁신, 변화, 새로움의 시작을 의미한다.
1) 난관에 봉착
2) 놀라움 (=철학의 시작)
3) 무지의 발견
4) 무지를 벗어나려는 갈망 (=철학)
필자는 철학의 시작이 무엇이고, 누가, 어떤 “주의(ism)”가 더 옳고 그른지, 어떤게 맞고 틀린지에 대한 철학적 논쟁과 그 역사 등은 잘 모르지만, 무언가의 시작이 “놀라움”이라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의해 놀라움을 겪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알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것에도 놀라지 않는다 (정확히는 놀라움이 덜하다)
결국 철학의 역할은 끊임없는 놀라움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 절망과 고통 대신 변화와 혁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 옛것에 대한 익숙함과 그리움을 새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바꾸어 나아가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더 확장해보자면, “수동적인 철학”과 “능동적인 철학”으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수동적인 철학은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또는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 속에서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새로움, 혁신, 변화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의 수동적 방법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철학의 시작과 이유의 방향이 같다.
1) 난관에 봉착
2) 놀라움 (=경영의 시작)
3) 무지의 발견
4) 무지를 벗어나려는 갈망 (=경영)
반면에 이를 능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놀라움을 능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자신을 놀라움이 있는 비확실성의 영역에 끊임없이 던져 넣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에 따른 결과물이 수많은 난관일 것이고, 그 끝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보상이 주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난관, 즉 길을 잃는 상태를 걷다가 직면하는게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위해 능동적으로 길을 잃는 방법이다. 물론 놀라움을 능동적으로 찾는 행위는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지구 역사상 극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능동적 탐험가의 태도로 살아간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놀라움을 통해 미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공급이 수요를 선행한다고 굳게 믿었고 (=사용자들은 자신에게 보이기 전까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믿었고), 인간이 서로 연결된 미래를 수십 년 전부터 갈망했던 스티브 잡스도 같은 맥락의 사람이다. 이들은 놀라움 그 자체의 필연성을 받아들이고 그 놀라움을 “사랑”했을 것이다.
수동적 철학은 미시적이고, 능동적 철학은 거시적이다. 수동적 철학은 삶의 태도이고, 능동적 철학은 삶의 방향이라 볼 수 있다. 철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경영적 관점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중심에는 놀라움이 있다. 우리는 그 놀라움에 대한 태도가 어떤가에 따라 극명히 다른 인생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