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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음 May 28. 2024

0. 내가 우울증이라니

회복을 향한 기록의 시작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했다. 


살면서 늘 어느정도의 우울감은 있었지만, 타고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원체 생각도, 걱정도 많았고 상상도 망상도 많이 했으니까. 

불안함과 기복, 충동은 내 삶을 이끌기도 하고 또 침체시키기도 하는 원동력이었다. 

학교와 직장은, 이런 나의 타고난 고질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하고, 또 첫 직장에서 곧바로 이직을 하고. 


내 삶에는 늘 울타리와 챌린지가 있었다. 

지겹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던 그 속박들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했던가. 

그때는 몰랐다. 그것들이 내 삶을 정상궤도로 지탱하고 있던 최소한의 안전망이었던 것을. 


프리랜서와 작가. 

이 불안정한 직업적 키워드 두 가지가 지금 내게 주어진 몫이다.

퇴사 2년째.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시작한지는 만 3년 째. 


그렇게 꿈꾸던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나는 불행과 불안에 침잠되어 가고 있다. 


현실이 된 꿈은, 역시나 장미빛이 아니었다.

모두가 힘들다고 했던 길인 걸 알았지만, 나는 다를 거라고 기대했었다.

나는 고군분투 끝에 내게 주어진 운명에 접어들었으니 (여기에 이르기까지 심적 물리적 고생도 했었고)

이제는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고 믿었었다. 

나는 특별할 거라고. 내 재능과 운명은 그런 거라고. 


하지만 모든 게 다 내 착각이었다. 

행운과 요행은 (당연한 말이지만) 영원히 내 몫이 아니었다. 

운구기일이라는 이 업계에서, 그 운이라는 놈이 도무지 내게 오지 않는다.  


끝없는 기다림과, 반복되는 좌절. 

그렇지만 계속 할 일이 있다는 압박감.

일은 해야하지만 이어지는 수입이 없다는 불안감. 


일이 안되는 데는 분명 원인이 있을 터였다. 

원하는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원인과 이유 모두 이제 더는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없었다. 

타이밍. 운. 업계 상황 등등. 내 노력과는 무관한 무언가들. 

그래. 그래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거다. 

운이 올때까지. 타이밍이 내것이 될 때까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운도 타이밍도 다 핑계고. 

그냥 내가 다 잘못한 게 아닐까. 

내 작품은 아주 근본부터 잘못된 건 아닐까. 

내 재능이 그저 거기까지인거 아닐까. 

그냥 내 운명이 허락한 것이, 내 운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이 딱 여기까지 아닐까. 

나는 내가 우울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껏 내가 그 정도의 좌절을 겪지 않았기에 긍정적으로 보였던 건가.. 

사실 나에게는 이런 좌절을 극복할 능력이 없는 건 아닐까. 

그럼... 나는 이제 어떡하지. 


(이렇게 쓰고 보니 멘탈이 멀쩡할 수가 없는 상황이 맞긴 맞구나...) 


나는 이런식으로 나를 갉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자해를 내 마음에 반복하면서. 


어느 날 부터인가, 툭하면 짜증이 났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생각은 많고 불안한데, 자꾸만 현실을 회피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글도 쓰고 싶지 않고.

이제는 일이 잘 된다고 하더라도. 별로 기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도 귀찮고. 드라마도 보고 싶지 않았다. 

누가 툭 건드리면 눈물이 났다. 그것이 잔소리든, 위로든. 

내 감정이 어떻게 건드려지든 그냥 툭. 하면 뚝뚝 눈물이 났다. 


여느 때와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감정 기복이 있어왔기에, 이번에도 그저 그런 '울'의 사이클이겠거니 했는데. 

그 농도와 깊이가 평소 같지 않았다. 

물에 젖은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심해에 가라앉는 듯. 이겨낼 수 없는 무기력이, 나를 잠식해갔다. 


아, 나 좀 고장난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좀 무섭기까지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내게 병원에 갈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지만, 약물 치료를 받으면 무기력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조언에 솔깃했다.  

이 지겨운 무기력을 치워버릴 수만 있다면. 

계속 일상을 굴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곧바로 병원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여러 추천을 받아 찾아간 곳은, 약물치료가 주력인 병원이었다.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의사 선생님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증상을 들어주었다. 


- 어떻게 오셨어요? 

- 무기력해서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무기력한 것 같아요. 

- 생각이 많다는 걸 좀 풀어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길지 않았던 상담 끝에, 선생님은 내게 우울감을 먼저 치료해야 할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사실 이때만 해도 '무기력증'만 생각했지, 그것이 '우울증'과 맞닿아있을 거라고까진 생각을 못해서 약간 생경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우울증이라니. 말로만 듣던 우울증이라니. 

티비와 유튜브에서 접했던 우울증에 대한 이미지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았다. 

아침에 먹는 초록색 약과, 필요시 먹는 단추같은 알약 두 개. 

초록색 약은 세로토닌인가 뭔가를 조절해줘서 의욕을 샘솟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찾아보니 항우울제로 많이 쓰이는 약이었고, 내게 처방된 용량은 아주 낮은 편이었다. 

필요시 약은 내가 불안감이 극심해질 때 먹으면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 작은 알약들이 내게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그마한 기대를 걸어본다. 

내 일상의 무기력이, 그리고 우울이 조금씩 거두어지기를. 

내 운명의 싸이클이 운과 타이밍을 만날 때까지. 

그때까지 내가 기다리고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기를. 


미루기만 했던 나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라도 하고 있는 걸 보면. 

벌써 조금씩 도움이 도움이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플라시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기록을 시작했고, 기록을 이어가보려고 한다. 


나의 우울과 회복의 기록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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