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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음 May 29. 2024

3.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하지만 이 글을 쓰다보니 조금 의욕이 샘솟는 날  

알 수 없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날씨도 좋았고,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은 반나절을 침대에서 뭉그적 거렸다. 

아침약을 먹었는데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이걸 무기력하다고 정의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때로는 내 일이, 기약없는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언제 끝날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전쟁터. 

그곳에서 정체도 알 수 없고, 형체도 알 수 없는 적과 매일 싸우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멱살을 잡아끄는 것도 아니다.

 

모든 건 오롯이 내 선택이다. 

사실 이 지루한 싸움의 휴전이나 종전 또한, 내가 정하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멈추고자하면, 적은 나를 붙들지 않을 것이다. 


오늘 눈을 뜨니, 그런 기분이 드는 거다. 

침대가 안겨주는 안락함이 이렇게 좋은데. 

굳이 내가 싸워야 하나. 나를 이렇게 내몰아야 하나. 

오늘 하루쯤 이렇게 뭉그적 거려도 아무도 모를 텐데. 분명 그럴텐데.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매일 터덜터덜 나만의 전장에 나가는 건, 이것이 내 오랜 꿈이기 때문이다. 

승전이든, 패전이든. 

끝까지 승부를 보지 않고서야 두고두고 미련이 남고 후회할 것을 아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결국 꾸역꾸역 노트북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공허하게 깜빡거리는 흰 화면을 몇 시간 내내 노려보다 끝나는 하루가 될지라도, 일단은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초록색 아침약이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날인 것 같지만. 

그 힘에만 의지하기엔 내게 남은 과제가 너무 많아서. 






어제는 날씨가 유독 좋았다. 

늦봄의 저녁, 나는 친구 J를 만났다. 

J는 어릴 때 친구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다시 만난 인연이다. 

내게는 그런 일이 꽤 잦은 편이다. 

예전의 인연들을 일 하면서 다시 만나거나, 지인의 지인으로 다시 만나거나. 

세상이 원래 좁은 건지, 아니면 내 세상이 유독 좁은 건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 것 같다. 


그 중에서도 J와의 인연은 유독 신기하다. 

어릴 때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에 대한 인상은 유독 강렬했는데. 

나 또한 그 친구에게 그렇게 남은 모양이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성질은 다르지만, 꽤 비슷한 모양의 일을 하고 있었다. 

현상을 대하는 태도와 성격은 서로가 달라도, 현상을 받아들이는 인식과 가치관은 꽤 비슷했다. 

우리가 단절돼 있던 1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그래서 나는 J와의 대화가 늘 재밌다.  


따져보니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도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2년 간 각자의 삶의 무게를 충실히 짊어지다 다시 만난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서로의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나누었다. 

지금 나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도. 


- 너 굉장히 건강하구나. 네 스스로 병원에 가겠다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건, 여전히 네가 건강하기 때문이야. 잘했어. 


나를 그리 격려하는 J에겐, 생명력이 가득했다.  

그녀는 언젠가 나와 비슷한 힘듦을 겪었고, 여전히 회복해가고 있는 과정중에 있었다. 

나는 2년 전 힘들어 했었던 J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기쁘고 반가웠다. 2년만에 만난 그녀가 품고 있는 생기와 생동감이.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한 우리는, 그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을 찾았다. 

오래된 방명록들이 가득한 그곳에는, 우리가 교복을 입고 반 친구로 처음 만났던 그 해의 기록들도 남아있었다. 그때 이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생을 살아갈까. 

나는, 앞으로 어떤 생을 그려갈까. 





분명 아무 것도 하기 싫었는데, 이렇게 쓰다보니 뭔가 나아진다. (신기하게도) 

어제 J와 함께 그 찻집의 방명록들을 보며, 기록의 위대함을 실감했었는데. 

기록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그로써 느낄 성취와 보람이 잠잠한 의욕을 툭툭 건드린다. 

나의 일상이든, 상상이든. 

뭐든 기록하며 남은 하루를 보내봐야겠다. 


그럼 뭐라도 남는 게 있겠지. 

나중에 '나의 인생'이라는 선으로 연결할 수 있는, 작은 점 하나라도.


하루하루 무언가 남겨보자는 이 마음가짐이, 어쩌면 회복의 중요한 힌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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