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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r 16. 2022

증언들, 신의 맷돌


어떤 후일담들은 참 의뭉스럽다.

‘이후로 행복하게 산 그들’은 대부분 ‘옛날 옛적’에 머문다. 진짜 그랬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들의 후일담일 ‘우리’가 서있는 곳을 돌아보면 의심은 되려 확신이 된다. 우리는 차라리 이끼를 덮고 근근이 살아남은 마녀, 멸시를 친구 삼은 난쟁이, 비명으로 흩어진 소망에 가깝다.



나는 과거에서 온 망명자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은 여성이 생식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시녀 이야기>의 후일담이다. <시녀 이야기> 속 여성들은 문자 그대로 자고 일어나니 존재가 지워진다. 혐오를 기반으로 권력을 약탈한 극단적 남성우월주의 집단은 여성 자체를 부정한다.

범죄자들의 매뉴얼은 언제나 뻔해서 길리어드의 여성들은 이름과 교육, 위생부터 뺏겨 길들여진다. 철저히 ‘자궁’을 기준으로 등급화* 되어 배급, 재활용, 폐기의 수순을 거친다. (*계급이 아니다. 계급마저도 남성에게만 해당된다.) 길리어드 집권 전반기에 해당하는 <시녀 이야기>는 성노예 시녀 중 한 명이자 이전엔 당연한 여성 중 한 명이던 주인공 ‘준’의 자각과 모호한 행방으로 마무리된다.




정확히 말해 공포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대신 공포는 마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길리어드 집권 후반기를 그린 <증언들>은 무척 고요하다. 그러나 덧바른 페인트 위로 스물스물 번져 나오는 찐득한 고요함이다. 같은 여성을 사육함으로써 한정적이나마 수혜를 확보한 명예 남성들, 영문도 모른 채 더욱 수월히 배급되는 소녀들, 그리고 터지기 직전 둑을 막고 있던 작은 골무 같은 이들의 증언이 교차 서술된다. 변명일지 성찰일지 모를 독백들은 플래시 백을 거쳐 ‘준’을 추적한다. 독자인 우리는 조각난 독백을 이어 붙이며 그녀들의 회한과 자각을 함께 더듬게 된다.



시작은 사소했어요.

The prelude was minor.

<증언들> 후반부의 전개는 다소 동화의 화법 같은 구석이 있다. 길리어드의 모든 범죄자들에 관한 후일담은 유추될 뿐이다. 그럼에도 소아성범죄자만은 아주 확실하게 효수된다. <증언들>의 소녀들은 ‘관습적으로 선호되는 훈훈한 연대’를 보여준다. 거의 클리셰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이 점이 <증언들>의 미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문장도 구조도 아닌 메시지의 주체에 집중한다. 미학적인 선택을 버리고 나이브하다는 공격을 감수하고도 어리숙할 정도로 어리고 순수한 믿음에 지지를 보낸다. 이 작품이 여성주의나 애트우드 개인의 명성에 기대고 있다는 평가야말로 나태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 있지만 우리의 분노와 공포는 한 곳에서 태어났다. 가장 안전한 곳이란 결국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을 허물어낸 곳이다. <증언들>은 재앙뿐 아니라 변혁 또한 한 순간일 수 있음을 주지 시킨다.



“신들의 맷돌은 서서히 빻지만, 아주 곱게 갈아낸단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표작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시녀 이야기> 일 것이다. 도태된 것이 그녀의 후속작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다. 전복의 선봉에 선 이야기들은 여전히 가장 앞 줄의 깃발일 수밖에 없다. <증언들> 또한 그 옆에 설 깃발로 당당하다. 모두가 냉소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절망의 세대에게 끝내 희망을 이야기한다. 오늘 흘린 피가 무의미해 보여도 결국엔 진짜 유산으로 살아남으리라 독려한다.


우리가 마주치거나 외면하는 모든 증언들-이것은 결국 생존자의 기록이다.

꿀벌과 펭귄, 고양이와 어린이, 여성, 장애인, 소수자의 독백이다. 가해의 위치에 설 수 있음에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의 상식이다.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하게 자신의 기득권만을 신성시하는 광신도들에 대한 투쟁의 이야기다. 가진 것 중에 귀한 것이라곤 쪼그라든 성기 밖에 없어 섹스에 미쳐버린 저능아들에 관한 예고 사격이다. 무지한 외면을 택한 나와 당신에 관한 진술이다.

안이한 낙관을 버린다. 혐오 세력에 대한 관용을 버린다. 반드시 그 값을 치를 것이다.

그리고 이 다짐만은 기어코 남겨둔다. 과거의 망령도 미래의 지침도 아닌 언제나 현재의 여성으로 살겠다. 이렇게 하찮은 다짐마저 미래의 증언에 보탤 수 있도록 냉소가 아닌 침착한 분노를 벼려두겠다.

심판과 관용만이 고민일 ‘언젠가’를 위해 기꺼이.





@출처 및 인용/

증언들, 마거릿 애트우드 (The Testaments, Margaret Atwood, 2019)

증언들 (황금가지, 2020, 번역 김선형)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The Handmaid's Tale, Margaret Atwood, 1985)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2018, 번역 김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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