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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17. 2022

제인 오스틴,
독자여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해석은 영감과 즐거움을 부풀린다. 그러나 한편으론 얄팍한 오독을 해석으로 우기는 경우 또한 얼마나 많은지. 제인 오스틴도 사랑받는 만큼이나 종종 오독되는 작가이다.

최초의 취향에 관한 리트머스 중 소녀 삼 부작-<빨강머리 앤>,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로 나뉘던 선호는 근소한 차이지만 수순처럼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으로 갈라지게 된다. 조용하게 흐르는 제인 에어의 열정, 히스 위를 구르는 캐서린의 광기에 얼마나 매혹되었나.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제인 오스틴의 진짜 매력을 깨닫게 되는 건 소녀 취향 열정에서 벗어나게 되는 나이-로맨스의 이면을 깨우치는 때라고 생각한다. 노련한 ‘리얼리즘’으로 구축되었음에도 오스틴의 해피엔딩은 그녀가 살던 시기엔 ‘판타지’ 장르로나 분류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쪽 숲 나라, 오만과 편견 https://brunch.co.kr/@flatb201/115

#제인 오스틴, 독자여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https://brunch.co.kr/@flatb201/291

#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의 지하실 https://brunch.co.kr/@flatb201/296

#오만과 편견, 리지 베넷과 세 번의 청혼 https://brunch.co.kr/@flatb201/304

#오만과 편견, 샬럿 루카스의 응접실 https://brunch.co.kr/@flatb201/305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판본) https://brunch.co.kr/@flatb201/306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2(예문) https://brunch.co.kr/@flatb201/307

#오만과 편견 그리고 팬픽 https://brunch.co.kr/@flatb201/308

#제인 오스틴과 펭귄 https://brunch.co.kr/@flatb201/310

#제인 오스틴의 숙녀들은 왜 걸어 다닐까?

#의뭉스러운 숙녀들





찻잔 속의 세계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종종 세상의 거대함을 알지도, 알려하지도 않은 티타임의 세계로 폄하된다. 나직하게 흘러가던 그녀의 소설과 달리 오스틴이 살던 시대는 사고와 환경 모두 격변기였다. 오스틴의 전 생애는 전쟁의 시대였고 그녀의 사촌만 해도 대혁명의 단두대로부터 도망쳤다. 지리적 확장은 제국주의뿐 아니라 계층이동의 욕망을 부추겼다. <설득>에서도 활용된 오스틴의 오빠나 고모처럼 식민지 진출을 통해 세습 자본 극복을 꿈꾸는 계층이 전진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제인 오스틴은 시대적 변화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라는 거시적 항목을 시골 사교계라는 미시적 세계에 중첩시켜내는 세련된 기술을 구사했다.


알려진 대로 제인 오스틴의 개인적 기록 대다수는 가족에 의해 파기되었다. 오스틴 사후의 영국은 본격적인 빅토리아 시기로 진입했다. 오스틴의 신랄함은 성별과 계급에 따른 롤을 강박적으로 규정한 빅토리아 시대에 대척되었다. 가족들은 ‘작가 제인 오스틴’을 후대의 이상적 기준에 맞춰 편집했다. 그러나 오스틴의 녹록지 않음은 얼마 남지 않은 기록에서도 유추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집안의 천사와 제국의 신사 https://brunch.co.kr/@flatb201/233


셔번의 미세스 홀이 어제 유산했대. ..내 생각엔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남편 얼굴을 쳐다봤던 것 같아.

- 언니 카산드라에게 (가차 없는 얼평에 섹드립;;)


가엾은 부인 같으니라고! 아니 어떻게 또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디즈 부인과 그 남편한테 각방을 쓰는 단순한 요법을 권하고 싶어.

- 언니 카산드라에게 (지인인 디즈 부인은 여덟 번째 임신을 했다.)


어제는 정찬으로 거위 요리를 먹었어. 덕분에 내 <이성과 감성> 2쇄가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

- 언니 카산드라에게




‘선택’하는 여성

제인 오스틴이 집필을 시작한 시기는 문학의 시대기도 했다. 대다수 분야처럼 교육, 직업적 글쓰기는 남성들의 고유 권한이었다. 순회도서관이라는 이동식 도서 보급망은 독서에 대한 수요를 확장시켰다. 교양의 범주 안에서만 허용되던 여성들의 글쓰기는 직업적 시도로 발현된다.

그러나 당시 여성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신이 속한 계급에서 낙오될 위험을 동반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고 여성의 목소리는 감상되는 것이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애용되는 ‘취집’이란 오독이 제인 오스틴의 시대에는 ‘선택’이 아니었다. 젠트리 계층 부상과 더불어 자유연애가 정착되기 이전 결혼은 빠를수록 기혼 남성에게 이윤을 남기는 필수 계약이었다. 상속권조차 없었기에 여성은 성별로 인한 희생마저 주장할 수 없었다. 현대의 여성들이 경제적 자립에 따라 한정적이나마 선택할 수 있게 되자 출산율이 떨어지고 기본권 회수를 향한 멍청한 공격들이 거세지는 것에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선택이 없는 시대의 여성이 자유 의지를 행사했음에도 되려 부와 명예를 얻는 결말은 공고한 현실 계급사회에서 불가능했다. 역시 선택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음에도 오스틴은 선택한다. 결혼이 곧 생존인 시대에 글로서 스스로의 세계를 보존하기로.


레이디 손드의 재혼 소식을 듣고 놀랐지만 불쾌하지는 않았어. ..난 누구나 사는 동안 사랑을 위한 결혼을 한 번은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 언니 카산드라에게


독신 여성은 가난해지기 쉽거든. 그래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강조되는 거지.


아, 결혼하면 너는 얼마나 많은 걸 잃게 될까!

..행여 너의 감미로운 정신의 유희가 배우자와 어머니로서의 애정에 묻혀버린다면, 난 널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 가장 아끼던 조카 패니에게




작가의 언어

전업 작가를 결심한 제인 오스틴은 ‘문학적 야심을 충족하면서도 잘 팔리는 작품’을 쓰고 싶어 했다.

관습을 따라 오스틴 또한 첫 출간작을 익명으로 발표해야 했지만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숨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데뷔작이 기대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실망했어도 좌절하진 않았다. 자존감 넘치고 성깔부리기도 두려워 않던 오스틴은 영업에 나태한 출판업자를 야무지게 압박했다. 당대의 여성에게 절대 미덕이던 겸손으로 눌러 참는 유리 멘탈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본인의 작품 세계에 관한 맨스플레인을 세련되지만 단호하게 반박했다. 잠재적 스폰서로서 왕실 독자가 암시되었는데도 말이다. 


저 역시 작센-코부르크 왕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 로맨스가 제가 다루는 시골 마을의 가정생활 묘사보다 더 돈이 되거나 인기가 있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서사시를 쓰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로맨스를 쓸 수 없습니다. 제 목숨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도 진지하게 자리에 앉아 진지한 로맨스를 쓸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저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저만의 방식대로 계속 글을 써야 합니다. 비록 그렇게 해서 또다시 성공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식으로는 철저히 실패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섭정 황태자 전담 사서 제임스 클라크의 맨스플레인에 대한 답장


당대에 유행한 작품들로부터 자극받았지만 휘둘리진 않았다. 당시 확실한 독자층이 확보된 낭만적 감상주의가 아닌 사실적 관찰로 쌓아 올린 신랄한 풍자를 구사했다. 집필 순서상 초기작인 <노생거 사원>에는 오스틴의 근원적 에너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주변인들에게 읽어주며 수시로 뜯어고쳤다. 인지도를 얻은 후에도 한미한 수입에 가사 노동을 병행했다. 변변한 자리도 없이 이동식 책상을 들고 다니며 투병 마지막 날까지 글을 썼다.


난 언니가 어떻게 집안일을 돌보면서 지금 하는 일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는지 종종 의아한 생각이 들어. ..나로서는 양고기 구이와 루바브 용량 같은 것으로 머릿속을 채운채 글을 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거든.

- <이성과 감성> 집필 시 언니 카산드라에게


제인 오스틴은 물론 톰 르프로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에 일생의 모든 감정을 묻었을까? 그녀의 작품 아래 흐르는 목소리, 그녀 방식의 투쟁적 글쓰기를 반추해보면 오스틴 평생의 연인은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회한은 있었을지언정 후회하진 않았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모든 작품은 찻잔 한 잔에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재는 거대한 세계를 찻잔 하나의 함의로도 담아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로맨스로서든, 풍자극으로서든 그 세계의 한 부분을 취사선택해 즐기는 취향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거대한 함의를 오로지 찻잔 한 잔으로만 취급하려 든다면 그건 취향이 아닌 본인의 수준일 따름이다.

시대를 넘나들며 존재감을 획득하는 작품들은 그 해석이 ‘현재’의 정답인가를 떠나 질문을 던지고 반박하게 만든다. 도착하지도 않은 미래를 날카로운 통찰로 벼려낸다. 때문에 이토록 다르다 주장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고전을 읽는다.





@인용/

시공사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시공사, 2016)

제인 오스틴의 말들 (마음산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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