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들여다보기 2
축구와 꽃꽂이의 공통점은 ‘공간 창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타일마다 다르지만 꽃꽂이의 공간감을 만드는 데 있어 카네이션은 무척 유용하다. 그린이 주를 이룰 때와는 또 다르게 다양하게 공간을 채워 ‘메우기 꽃’으로 불리곤 한다.
창작물의 주인공에겐 대개 그들의 매력을 증언해줄 친구나 조력자가 주어진다. 비교군으로 활용되는 이들은 주인공에게 우호적이어야 하는 캐릭터 롤에 따라 경쟁자의 존재감을 가지진 못한다. 조연들의 롤은 여백을 채우는 것이지만 어떤 여백들은 스스로의 자리로 존재한다. 무수한 주인공 친구들 중에서 <오만과 편견>의 ‘샬럿 루카스’도 뛰어난 공간 창출 능력을 보여준다.
#서쪽 숲 나라, 오만과 편견 https://brunch.co.kr/@flatb201/115
#제인 오스틴, 독자여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https://brunch.co.kr/@flatb201/291
#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의 지하실 https://brunch.co.kr/@flatb201/296
#오만과 편견, 리지 베넷과 세 번의 청혼 https://brunch.co.kr/@flatb201/304
#오만과 편견, 샬럿 루카스의 응접실 https://brunch.co.kr/@flatb201/305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판본) https://brunch.co.kr/@flatb201/306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2(예문) https://brunch.co.kr/@flatb201/307
#오만과 편견 그리고 팬픽 https://brunch.co.kr/@flatb201/308
#제인 오스틴과 펭귄 https://brunch.co.kr/@flatb201/310
#제인 오스틴의 숙녀들은 왜 걸어 다닐까?
#의뭉스러운 숙녀들
“샬럿 루카스가 이 집 안주인이 된다는 걸 생각하면 괴로워 죽겠어요. 내가 그 애한테 밀려나고 그 애가 내 집을 차지하는 꼴을 봐야 한다니!”
샬럿의 아버지 루카스 경은 세습 귀족이 아니다.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포기 못한 허영이 있다. 상업으로 재산을 모은 그는 지역 유지 역할에 매진해 귀족 작위를 얻자 호칭에 부합된 삶만을 선호한다. 장녀 샬럿에게 별도의 신탁을 마련해 줄 유연함이나 여유 재산은 없다. 미모도, 재산도 없는 샬럿의 앞날은 암담하다. 때문에 샬럿은 리지가 거절한 콜린스의 청혼을 냉큼 수락한다. 절친의 상황도, 콜린스의 졸렬함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베넷씨 사후 베넷 가의 숙녀들은 콜린스 부부의 허락 없이는 티스푼 하나 마음대로 챙길 수 없다. 수년간 큰 딸에 대한 베넷 부인의 폄하를 견뎌야 했던 루카스 부인에겐 정말 통쾌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놀라니, 일라이자? 콜린스 씨가 너하고 결과가 안 좋았다고 어떤 여자의 호감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심정 이해해.” 샬럿이 대답했다.
“놀랐을 거야.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너도 언젠가 내 결정에 수긍할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낭만적인 사람이 아냐. 전부터 그랬어. 내가 원하는 것은 편안한 가정이야.”
경쾌함으로 가득한 <오만과 편견>에서 메리와 샬럿은 유독 냉정한 시선으로 다뤄진다. 자매들만큼 아름답지 않아선지 메리가 선택한 가치는 내적인 교양이다. 그러나 메리의 교양은 고루하고 진부한 데다 콤플렉스를 가리기 위한 얇은 보호막임을 눈치챌 수 있기에 짠한 마음이 든다.
샬럿은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처세를 보여준다. 제인 베넷의 수동성이 불러올 결과도 가장 먼저 알아챈다. 다아시의 갑작스러운 춤 신청으로 당황한 리지에게 ‘멍청하게 위컴 생각에 빠져서 그 보다 열 배는 중요한 남자에게 불쾌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속삭인다. 콜린스의 우스꽝스러움에 리지와 킬킬대지만 살뜰한 숙녀의 태도로 그를 대한다. 리지는 자신의 곤경을 덜어준 것으로 생각했지만 샬럿은 도입부부터 꾸준히 콜린스를 주시한다.
샬럿의 청혼 수락이 ‘취집’에 치우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인 오스틴이 섬세한 사실주의로 구현해낸 묘사로 인해 거의 비판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샬럿의 선택은 그녀가 처한 상황상 음모가 아닌 전략에 가깝다. 콜린스의 프러포즈는 샬럿에게 계급적 성과를 선사했지만 로맨스로는 너무 모욕적이다. 샬럿은 생존과 굴욕이라는 극단적인 대안을 두고 ‘선택’한다. 이 결단이 리지의 독립심 보다 덜 용감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너는 사람마다 상황과 기질이 다르다는 걸 무시하고 있어.
..활기찬 젊은이가 언제나 신중하고 사려 깊으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돼. 우리가 속는 건 실제로 자신의 허영심인 경우가 많잖니.”
샬럿의 선택에 실망한 리지의 토로에 제인 베넷은 차분하게 충고를 건넨다. 제인 오스틴은 은연중에 샬럿 같은 상황의 여성에겐 콜린스 정도가 적당하다고 여기게 되는 편협함을 지적한다. 리지를 통해 알려지듯 샬럿은 감수성 있는 인물이다. 리지에게 샬럿은 좀 더 대우받아야 할 가치가 있지만 리지 자신도 이 시스템 안에서 대안이 없고 배신감도 느끼며 한사상속이란 이중 구속에 괴로워한다. 멋진 친구가 가족주의 판타지에 굴복하거나 안주할 때 축하하면서도 안타까워했던 경험, 심지어 친구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배우자를 보고 분통 터뜨린 기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지 않나?
여성 캐릭터에 기대하게 되는 미모나 낭만은 없을지언정 샬럿은 성숙하다. (나이 설정에 있어서도 샬럿은 다아시와 동갑으로 리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루카스 부인조차 베넷 씨의 남은 수명을 가늠하며 승리감을 느낄 때 샬럿은 리지가 받을 충격을 걱정한다. 롱번의 모두가 이익에 기반해 샬럿을 비난할 때 근소하게나마 리지만이 샬럿의 감수성을 걱정한다. 리지의 실망감은 샬럿에 대한 애정에 기반한다. 짐짓 계도를 가장한 샬럿에 대한 리지의 지적은 제도적 가해에 내몰린 제인 오스틴 자신의 회의를 내비친다.
제인 오스틴은 작품마다 관습적인 자매애보다는 현실 인식을 택했다. 제인 에어와 헬렌 번즈로 대표되는 샬럿 브론테의 절절한 감상성을 떠올려보면 제인 오스틴의 우정은 차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한껏 예의 차린 티타임 신경전에도 결정적인 순간 제인 오스틴의 인물들은 합당한 변호를 받는다. 이것이 제인 오스틴 방식의 자매애라고 생각한다.
제인 오스틴이 샬럿을 단지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려했다면 후반부의 샬럿은 콜린스에게 좀 더 주도권을 내주었을 것이다. 샬럿의 선택은 <오만과 편견>이 구태의연한 로맨스가 아닌 문학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증명이다. 시큰둥하긴 했어도 브론테처럼 훌륭한 작가가 그 점을 몰랐을 리 없다.
..콜린스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함으로써 놓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대개의 경우 샬럿은 현명하게 귀를 닫았다.
..손님들이 떠나는 걸 서운해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동정을 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정과 살림, 교구와 가금들, 그리고 그런 것들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샬럿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콜린스의 졸렬한 과시에도 리지는 샬럿의 대처를 눈치챈다. 샬럿은 안주인으로 더 좋은 방을 차지할 수 있음에도 외진 방에 응접실을 꾸려 자신만을 위한 동선을 보강한다. 자신이 주도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생활에 매진한다. 같은 시대 같은 조건의 독자에겐 샬럿 방식의 해피엔딩마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샬럿에게도 더 사랑스러운 인연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적어도 샬럿은 선택했고 심지어 쟁취할 수 있었다. 이상적인 배우자는 아니지만 선택에 충실했다. 판단과 전략으로 그녀 스스로 일구어낸 행복이다. 우연에 기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리지의 독립심만큼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헤테로 4인 가족으로 대표되는 관습화 된 정상성 추구는 현재도 거의 맹목적이다. 현대의 샬럿이라 해도 결혼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마 현대라면, 그래서 샬럿에게도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샬럿은 분명 좀 더 나은 대상 혹은 다른 형태의 행복을 기필코 찾아냈을 여성이라 확신한다.
메우기 꽃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름조차 불분명한 조연에게도 그 자신이 주도해야 할 삶이 있다. 주도, 주인공이란 표현은 엄격한 강박을 부르지만 완벽하거나 완성된 행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모든 선택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다. 자신을 알고 가치의 범주를 정할 수 있는 것, 타인과 조화롭되 세상의 규칙 앞에 당당함이 손톱만큼이라도 우리 자신을 보존해 준다.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이듯* 장미만큼 드라마틱하지 않아도 카네이션 또한 여전히 향기로운 것처럼.
@출처 및 인용/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ine, 1813
Pride and Prejudice (Belknap Press, 2010, 일러스트 휴 톰슨 Hugh Thomson)
시공사 제인 오스틴 전집; 오만과 편견 (시공사, 2016, 번역 고정아)
오만과 편견 (천지인, 2009, 번역 김지선)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word would smell as sweet.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셰익스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