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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Sep 29. 2022

오만과 편견,
리지 베넷과 세 번의 청혼

오만과 편견 들여다보기 1


제인 오스틴의 부정할 수 없는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인기만큼 오독되는 경향이 있다. 오독의 원인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작품이 가진 ‘현대성’을 먼저 들어야 한다. 조지안 시대의 시골 사교계에서 무슨 현대성이냐고?

돈 혹은 세속적 성취에 관한 노골적인 목적의식은 표면상으론 거의 모든 로맨스에서 배척된다. 그런데 제인 오스틴의 로맨스는 정말 끝없이 돈 얘기를 한다. 이전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 여성이 자산의 일부이던 시대에 사랑으로 극복한 계급의식과 결혼은 판타지였다. 다아시와의 해피엔딩은 전지적 개입이 (소설이니까 당연히 작가의 개입) 있었기에 가능하다.

<오만과 편견>의 리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성과의 가능성을 가늠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자산으로 규정짓는 청혼은 끝내 거부한다. 이성에 대한 이런 모색은 현재 보편적인 탐색이다.


방금 <이성과 감성>의 2쇄 인세로 20파운드 가량을 받았어. 덕분에 내 안에서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마구 흘러넘치는 것 같아. - 언니 카산드라에게


‘자기만의 방’이 없던 제인 오스틴은 이동식 책상을 들고 다니며 가사 노동을 병행했다. 누군가 들어오면 원고를 가리느라 부산했다. 인기척 감지를 위해 고장 난 덧문을 고치지 않은 것은 제인 오스틴에 관한 한 줌의 일화 중에서도 유명하다. 브론테 자매는 글을 쓰기 위한 종이를 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브론테 자매보다는 수월하게 종이를 구했을지 몰라도 제인 오스틴이 선택한 독신 여성, 전업 소설가는 그 시대에서 부정되던 자질이다. 언뜻 대척점일듯한 버지니아 울프가 왜 매번 제인 오스틴을 언급했는지 이해하게 되고 만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소설로 써 대리만족했다는 오독은 얼마나 모욕적인가.


#서쪽 숲 나라, 오만과 편견 https://brunch.co.kr/@flatb201/115

#제인 오스틴, 독자여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https://brunch.co.kr/@flatb201/291

#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의 지하실 https://brunch.co.kr/@flatb201/296

#오만과 편견, 리지 베넷과 세 번의 청혼 https://brunch.co.kr/@flatb201/304

#오만과 편견, 샬럿 루카스의 응접실 https://brunch.co.kr/@flatb201/305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판본) https://brunch.co.kr/@flatb201/306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2(예문) https://brunch.co.kr/@flatb201/307

#오만과 편견 그리고 팬픽 https://brunch.co.kr/@flatb201/308

#제인 오스틴과 펭귄 https://brunch.co.kr/@flatb201/310

#제인 오스틴의 숙녀들은 왜 걸어 다닐까?

#의뭉스러운 숙녀들





첫 번째 청혼, 콜린스의 확신


“남자가 처음 호감을 표시할 때, 숙녀들이 속으로는 수락하면서도 겉으로는 일단 거절한다는 것을 말이죠. 때로는 거절이 두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도요. 때문에 저는 지금의 이 거절에 실망하지 않고, 머지않아 당신을 혼례의 제단으로 이끌고 가기를 희망합니다.”

“콜린스 씨,” 엘리자베스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제 말을 듣고 계속 희망을 품는다는 건 조금 의외네요. 저는 청혼이 두 번 반복될 때까지 행복의 기회를 미룰 만큼 대담한 여자가 아닙니다. (그런 여자들이 정말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제 거절은 진심입니다. 저는 콜린스 씨 곁에서 행복할 수 없고, 콜린스 씨 또한 제 곁에서 행복하실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사촌, 저는 당신의 거절이 관례적 언사에 지나지 않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양이 매력적인 분이긴 하지만, 나중에 다시 청혼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불행히도 경제적으로 불리하니 당신의 사랑스런 매력도 가려질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엘리자베스 양이 저를 진심으로 거절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우아한 여성의 관례에 따라 상대의 마음에 불안감을 조성해서 제 사랑을 더 키우려는 소망으로 여기겠습니다.”

“제발 믿어주세요. 콜린스 씨. 저는 존경할만한 남자분을 괴롭히는 그런 우아한 관례는 취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진정한 찬사는 저를 진실된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에요. 청혼해주신 것은 거듭 감사드리지만, 그걸 수락할 수는 없습니다. 제 감정이 한사코 거부합니다. 이보다 더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제 저를 남자를 애태우는 우아한 여자로 생각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청혼’이란 음절마다 탄식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라는 것은 대개 다음 순서가 있다는 뜻이고, 그 목적어가 청혼일 경우 적어도 한 사람에겐 원치 않은 경험임을 내포하고 있다. 애도와 분개 중 어느 쪽을 던질지는 당연히 그 내용에 달렸다.

리지에게 최초로 청혼한 이는 베넷 가의 먼 친척이자 한사상속 예정자인 목사 콜린스이다. 남성에게만 계승되던 당시의 상속법 상 베넷 씨 사후 재산은 교류도 없던 이 남성 친척이 물려받는다. 상속자가 아닌 가족들은 알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못생긴 콜린스는 졸렬하고 비굴한데 수치심은 없고 끈기는 넘친다. 하찮은 로맨스 빌런이어야 할 이 남성은 지금도 흔한 타입이라 현대의 독자에게 두 배의 탄식을 부른다. 이런 타입의 남성이 어떤 타격감을 줄 수 있을 리 없지만 콜린스는 리지가 아닌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그나마의 굴욕일 것이다. (사실 진짜 굴욕은 주제도 모르고 당당히 청혼하게 놔두었다는 거지만)

청혼의 성공을 콜린스는 의심치 않는다. 심지어 레이디 캐서린을 들먹이며 통제될 자산으로서의 여성이 필요함을 공공연하게 밝힌다. 너무 또렷한 리지의 거절을 거듭 무시하며 재정적 압박을 행사해 목적을 이루려 든다. 이 거절마저도 또 다른 남성인 베넷 씨가 개입하고야 받아들여진다.


하찮은 남자는 청혼도 하지 말란 말이야! 라며 분개할 수 있다. 하지만 콜린스는 자신을 전혀 하찮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콜린스는 다른 생식기를 달고 태어나 취득할 수 있던,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불로소득을 통해 시혜를 과시하고 있다.

콜린스의 명분에 따르면 상속자인 자신이 베넷 가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한사상속으로 취하게 되는 재정적 이익을 보상하려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속할 재산이 어떻게 보상이 되는가? 그가 주장하는 고결함대로라면 상속을 포기해 신탁을 만들거나 모종의 결혼 계약 없이도 후견인에 머물러야 한다. 더군다나 그는 존경해 마지않는 레이디 캐서린 덕에 로징스 교구와 코티지라는 안정적인 자산을 이미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리지의 목표가 다아시였기에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한 걸까? 콜린스가 청혼한 시기 리지는 다아시의 호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리지가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베넷 가 전체에 이중의 모멸을 준다. 리지가 거절한 청혼을 받아들인 절친 샬럿은 베넷 가의 딸들보다 훨씬 급이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경박한 베넷 부인은 샬럿의 외모와 처지를 대놓고 떠들어댄다. 그런 샬럿이 베넷 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 것이다. 베넷 씨가 사망하는 순간 베넷 가의 다섯 딸들을 기다리는 건 <이성과 감성>의 도입부이다. 청혼을 거절했을 뿐인 리지는 뜬구름 같은 개인적 이상 때문에 가족 전체의 생계를 내팽개친 희대의 이기주의자가 된 셈이다.

리지가 오직 ‘돈 때문에’ 반려자 사냥에 나선 골드 디거라면 콜린스의 청혼은 당연히 받아들여졌어야 한다.




두 번째 청혼, 다아시의 오만


“애써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가능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저히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열렬히 찬미하고 사랑하는지 밝히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긍정적인 답을 들을 것을 거의 의심하지 않고 있음을 그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는 두렵고 불안하다고 했지만 표정은 여유롭고 편안했다.


(다아시야.. 되겠니?)

누이동생 외엔 그닥 사근사근하지도 않은 다아시는 왜 헐레벌떡 로징스의 고모를 방문했을까? 그야 몇 달간 생각 속에서나 함께 하던 리지 베넷을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 타이밍이니까. 고백대로 고뇌하던 다아시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청혼한다. 그런데 이때의 리지는 제인과 위컴 문제로 그 어느 때보다 다아시를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없었더라도 다아시의 소망이 받아들여지진 않았을 것 같다. 

다아시의 고백은 표현만 훨씬 유려할 뿐 콜린스의 청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아시는 리지를 향한 애정보다 청혼을 망설이게 만든 자신의 고뇌를 더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고 묘사된다. 고민도 열정도 사실이지만 다아시는 거절당할 리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 확신은 콜린스의 주제넘음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데다 다아시의 계급적 오만이 더해져 모욕적인 시혜가 된다. 하지만 콜린스와 달리 다아시는 거절을 받아들이고 성찰했기에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세 번째 청혼, 신사의 품격


엘리자베스 일행은 모두 깊이 감탄하며 찬사를 바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펨벌리의 안주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쩌면 이곳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었어.’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위안이었고, 덕분에 후회 비슷한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여행 중 펨벌리를 방문한 리지는 소문으로 들어온 대저택과 정원, 예술품들에 압도된다. 지리적 이동이 힘든 시기였기에 모든 여행은 특별했다. 시골 숙녀가 물리적으로 경험한 외지는 세계관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리지는 표면적으론 언제나 지탄받아온 물질이 주는 체험적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세속적인 것에도 순정한 진리와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수치화된 자산가치로만 회자되던 펨벌리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인지되는 순간 리지는 사물도 인물도 한쪽으로만 규정할 수 없음을 깨우친다. 이런 성찰에는 다아시에 관한 편견이 중의 되기에 비로소 리지의 노선이 정해진다. (펨벌리 저택의 수집품이 선대로부터 계승된 제국주의 수탈의 일환일 것은 잠깐 눈감아주자. 우린 지금 로맨스를 읽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여성의 자기 검열은 강박에 가까워서 리지는 다아시의 호의를 되려 헷갈려하고 망설인다. 가족들의 부당한 비난에 내심 죄책감까지 품고 있던 리지는 펨벌리에 대한 순수한 찬사가 속물처럼 비칠까 신경 쓰인다. 주눅 든 리지에게 오히려 다아시가 분발하며 다가선다.


“다아시 씨와 결혼한다고 제가 제 환경을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사이고, 저도 신사의 딸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동등합니다.”

“당신은 너그러우신 사람이니, 제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시지는 않을 겁니다. 혹 당신의 감정이 아직도 지난 4월과 같다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제 애정과 소망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한 마디만 하시면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영원히 함구하겠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한결같은 자유연애 판타지는 20세기 중반 들어서야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세습귀족의 지배권은 토지 보유에서 나왔고 자산 유지를 위해 결혼은 계약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랑과 결혼이 별개인 것은 너무 당연했다. 18세기 들어 해외 자본을 바탕으로 부상한 젠트리 계급은 기존의 결혼 제도에 로맨스라는 가치를 덧씌운다. 이상적 가치를 젠트리 계급의 미덕으로 강조함으로써 여전히 공고했던 혈통 귀족의 권위와 차별을 둔 것이다. 이 시기 대거 등장한 여성 작가들이 소설을, 그중 로맨스를 즐겨 다룬 것은 허무맹랑한 대리만족이 아니다. 장르마저 당대에 부정당하던 소설을 선택해 새로운 계급과 가치를 예고했다.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우리는 종종 리지 베넷과 작가를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앤 헤서웨이나 키이라 나이틀리가 아니듯 그녀의 주인공들은 무결하고 순정적이기만 한 관념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다. 그녀들은 실수와 성찰을 번갈아 지나는 현실의 여성이다.

무엇보다 일방적으로 세계의 규칙을 정한 남성과 생물학적 성별만 여성인 명예 남성 앞에 비굴하지 않다. 이런 조망은 현대의, 현재의 독자인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다. 그 동시성이 주는 쾌감이 우리가 리지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출처 및 인용/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ine, 1813

Pride and Prejudice (Belknap Press, 2010, 일러스트 휴 톰슨 Hugh Thomson)

시공사 제인 오스틴 전집; 오만과 편견 (시공사, 2016, 번역 고정아)

오만과 편견 (천지인, 2009, 번역 김지선, 일러스트 휴 톰슨 Hugh Tho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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