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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r 17. 202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후의 유전자


가끔 의아하지 않나. 달걀은 왜 달걀인가? 우리를 분류하는 것들-이름, 종, 특성은 타당한가? 19세기에 떨어진 21세기의 인물, 남성의 몸으로 태어난 여성, 교감이 불가한 존재들과의 교감이 훨씬 수월한 이, 혹은 그 반대의 경우들이 천재, 비극, 괴짜의 카테고리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온당한가? 누가 그런 권위를 주장할 수 있는가? 어디서 온 정통성인가?

과학 기자 출신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기원을 역추적해 성찰을 구하는 에세이다.




화자인 ‘나’는 진보적인 괴짜 생화학자 아버지, 공격성에 수동적인 큰언니, 문젯거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작은 언니 사이에서 성장했다. 과학 기자가 된 나의 사회적 관계는 엉망진창이다. 아버지의 의도치 않은 가스라이팅에서 비롯된 자기혐오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아무 문제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이 문제인 나는 우연히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에 사로잡힌다.


19세기 후반 뉴욕 인근 농가에서 태어난 조던은 근면하지만 구태의연한 삶을 요구받으며 성장했다. 내성적이지만 자기 확신에 찬 조던은 지질학자 ‘루이 아가시’ 캠프에서 영감 받아 분류학에 투신한다. 당시 연구가 전무했던 물고기 분류를 시작한 조던은 추종자들과 함께 신기원을 이뤄나간다.

삶의 우연들도 그에게 미소를 던지고 시골 강사였던 조던은 승승장구한다. 재벌 스폰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거의 모든 권한을 틀어쥔 초대 대학 총장이 된다. 헌신적이지만 그를 지치게 한 첫 번째 아내가 죽자 스무 살 차이 나는 자신의 학생과 사랑에 빠져 활력도 되찾는다. 조던에게도 위기가 빈번하지만 ‘그의 우연’들은 여전히 그의 편이다.


조던의 삶에서 가장 인상적인 위기는 정적도, 가정불화도 아닌 ‘지진’이었다. 지진은 샌프란시스코뿐 아니라 그의 삶, 그의 정체성 자체인 물고기 표본을 남김없이 박살 냈다. 비린내와 살점과 악취가 피어오르는 잔해에서 조던은 직접 남은 표본을 재분류한다. 삶 전체를 부정당한 재해에 굴하지 않는 조던의 투지와 견고한 자기 확신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나에게 해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딱히 스포랄 것은 없지만 해당 책을 읽을 계획이 있다면 아래 부분은 넘기세요.)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맞지? 맞겠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관한 입소문은 적어도 빈 수레가 아니다. 그럼에도 소문난 반전이 충격적이진 않았는데 이 책과 별개로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연대기를 알고 있는 독자였기 때문이다. 조던의 생애를 둘러싼 이슈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화자가 배신 당하리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왜’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독서의 경험을 줄 것이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국내판 셀링포인트는 참 영리하다. 바이럴도 잘 탔고.

이 책의 반전은 사소하지 않다. 모럴의 문제가 개입되기에 ‘재미있다’ 보다는 ‘흥미롭다’라는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반전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꼼꼼히 읽어나갔을 때 그 반전의 수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룰루 밀러는 숭고한 투지로 포장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욕망과 작가 자신의 결핍을 병치 혼합해 질문을 확장시킨다. 무의미한 수집이 우연의 행운을 만난 덕에 선망하던 계급에 탑승한 조던은 자신의 오독을 맹신하게 된다. 우연을 당위로 만들기 위해 서슴지 않은 비도덕은 그의 학문과 사생활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자기 확신으로 포장된 맹신은 오독이 어떻게 모독으로 치환되는지 증명한다.


그 증명이 작가의 개인사와 엮이는 부분에선 사적인 동기로 여겨지는 부분도 있긴 하다. 그러나 룰루 밀러는 심신이 취약한 자들이 흔히 빠지는 맹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조던에 대한 도입부의 묘사는 다소 지루하다. 개천 용 서사에 대한 혐오라기 보단 초식남의 외피로도 가려지지 않는 음침함이 본능적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조던의 생애를 추적하는 룰루 밀러의 화법은 조던의 분류처럼 꼼꼼하다. 룰루 밀러는 아주 명료한 사실들, 과학의 역사에 근거한 증명, 심지어 조던의 오만한 자기 고백을 들어 실체를 폭로한다.

이 책의 결말에 이르면 조던과 룰루 밀러에게 전환점이 된 그 지진-루이 아가시의 동상과 박살 난 평생의 업적으로 가시화된 자연재해가 사실은 경고이자 천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룰루 밀러가 우주적 정의라고 표현한 심판 말이다. 이 책을 이미지로 요약한다면 아래의 두 삽화가 선택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독재자들의 시작은 사소했다. 수년간 불타오른 마녀 화형대는 한 터럭의 지푸라기로 지펴졌다. 자기 검열과 공정한 견제는 믿음과 지지만큼 한 바퀴로 굴러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멸망할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사라지는가 일뿐. 오랜 친구인 냉소를 끌어오자면 다정한 민들레와 지구가 먼저 사라질 것 같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는 어떤 존재로 사라질지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이 우리의 진짜 가치를 결정짓는 유전자일 것이다.





@출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Why Fish Don't Exist: A Story of Loss, Love, and the Hidden Order of Life., Lulu Miller, 일러스트 케이트 샘워스 Kate Samworth)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곰출판, 2021, 번역 정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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