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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Apr 15. 2022

소피 이야기, 소녀라는 문법


팬데믹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던 시기, 프랑스에선 코비드 명칭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단어에 성별 구분이 있는 프랑스에선 코비드를 통상적으로 우선되는 남성형으로 써왔다. 그런데 이 질병이 걷잡을 수 없는 팬데믹으로 규정되자 굳이 여성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급박한 역병의 시절 저토록 한가로운 꽃밭이 무려 아카데미 프랑세즈라는 점에서 비판이 더욱 거셌다. 프랑스어는 정말 아름다운 언어지만 총체적으로 웃기는 일이다. 뭐, ‘국제’는 남성형이고 ‘국내’는 여성형인 프랑스가 아니라도 익숙한 상황이다. 온갖 자연재해, 그 성격이 혹독할수록 그제야 여성에게 이름이 주어진다.


예법이라면 아시아 사대주의 못지않을 19세기 프랑스 소녀 ‘소피’도 여성형의 바운더리 아래 좌충우돌한다. 세귀르 부인의 창작동화 <소피의 불행 Les malheurs de Sophie, 1858>은 제목의 드라마틱함에도 어린이들의 일상다반사로 채워졌다. (이하 <소피 이야기>로 제목 통일) 아동 훈육의 목적으로 쓰인 19세기 원작은 현재에 딱 들어맞진 않는다. 갖가지 체벌은 감정적으로 고통스럽다. 오히려 시선을 사로잡는 건 육중한 프랑스 예법으로도 누를 수 없는 어린이들의 생동감이다.


#소피 이야기, 오늘의 과일 설탕절임 https://brunch.co.kr/@flatb201/20

#소피 이야기, 당나귀 https://brunch.co.kr/@flatb201/202

#소피 이야기, 소녀라는 문법 https://brunch.co.kr/@flatb201/298

#소피 이야기, 빈티지 일러스트 https://brunch.co.kr/@flatb201/299




프랑스 인형

주둔지 착취로 보급을 해결해 온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원정에서도 놀라운 기동성을 보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입성한 모스크바는 텅 빈 유령도시였다. 적군의 전략을 파악한 모스크바 총독이 시민들을 피난시킨 후 도시 전체를 불살랐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파국을 향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표 도시 하나를 날린 총독 역시 처벌을 피해 망명해야 했다. 총독의 딸은 프랑스 예법 속에 자라게 된다. 성인이 된 그녀는 불성실한 남편 대신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는다. 그 애정은 키스와 허그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직 동화의 개념이 없던 시절 훈육 목적으로 집필된 <소피 이야기>는 러시아 망명 귀족 세귀르 백작부인의 자전적 요소가 포함된 이야기다. 낯설고 빡빡한 환경과 서먹한 새엄마를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그녀 자신의 경험을 여러 연작으로 발표했다. 그래서인지 시리즈마다 날것의 어린이들이 나온다.


파리에서 제작된 귀한 밀랍인형으로 즐겁던 소피는 비명 지른다. 햇빛에 방치한 밀랍인형의 눈알이 녹아버린 것이다. 점점 망가져 기괴한 몰골이 된 인형을 수습해 소피는 사뭇 엄숙한 장례식을 집도한다. 거창한 행렬에 은근 의기양양 해진다. 넘쳐나는 식탐에 설탕절임 한 상자를 다 먹어치우고 샌드위치 토핑으로 관상용 물고기를 다진다. 허영심은 부추기는 친구 같아서 눈썹을 밀어 민둥 상태가 되고 예쁜 곱슬머리를 만들려 자진해 물벼락을 맞는다. 단지 빨리 달리고 싶어 의도치 않게 당나귀를 괴롭혔을 뿐 정말 악의는 없다. 그저 어린아이다운 산만함, 부주의함, 미숙한 판단으로 인한 말썽이다. 소피는 그림 같은 프랑스제 인형이 아닌 살아있는 어린이기 때문이다.


<소피 이야기>에는 유년의 광란뿐 아니라 내재된 천진함이 온전히 묘사된다. 말썽만큼이나 문제 해결도 그야말로 어린이답기에 종종 찡해진다.

사고 수습을 위한 소피의 변명은 하찮기 그지없다. 모범생 폴은 소피에게 종종 브레이크를 걸지만 깐죽대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소피의 변명이 그럴싸해지도록 공모해준다. 까딱하면 실명 같은 더 큰 재난이 닥칠 수도 있건만 가시덩굴에 굴러 얼굴을 망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이들에게는 당장의, 친구의 두려움이 가장 큰 재난인 것이다. 결국은 또 사고를 치지만 소피는 적어도 같은 말썽을 반복하진 않으려 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하찮고 기특하고 멍청하고 상냥한 순간을 거쳐왔다.

함께 말썽을 쌓아온 소피와 폴도 각자의 상대를 만나 부모가 된다. 훈육서답게 결국 소피도 현숙한 숙녀가 되리란 암시가 이어진다. 21세기의 독자에겐 마치 가의 자매들, 앤과 주디의 후일담만큼 맥 빠지는 결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목격한 말썽들로 소피가 엄한 ‘숙녀’보다는 포용력 있는 ‘여성’이 되지 않았을까 기대해보게 된다.




참 잘했어요!

‘봉 포인트 Bon Point’는 신교육법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던 프랑스 학교의 보상제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보통 10포인트를 한 세트로 모아 상위 포인트의 그림카드를 획득하고 최종 결산에선 책이나 문구 같은 상품으로 수령된다. 초기 카드에는 단순한 넘버링부터 우화, 고전, 성경의 내용들이 그려졌으나 후대로 올 수록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일러스트가 다양하게 도입되었다. 연대별로 다양한 빈티지 이미지에 수집가도 많다.

18세기에 시작된 이 제도는 1960년대경까지 사용되다 점차 사라졌다. 결과론적 상벌제도의 모럴이 지적되며 논란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저 소소한 상벌제도에도 예민한 논쟁이 이어지는 건 한정된 점수로 재단하기엔 어린이들은 모두 다양하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에겐 결과와 무관하게 가능성의 통로가 주어져야 한다.

1920-70년대 봉 포인트 카드




어린 소피는 고루한 문법적 여성성에 갇히고 학습을 강요받는다. 소년의 미덕으로 폴의 다정함과 섬세함은 고전적으로 장려되는 항목이 아니었다. 어린이 본연의 천성이 외면된 계도는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다. 여자어와 남자어가 따로 있을 리 없다. 어린이를 혐오의 단어로 눙치는 것은 일상적 밈이 아닌 천박한 악의이다. 혐오를 지지하지만 나쁜 사람처럼 보이기 싫은 것일 뿐이다.

교육은 분명 어렵다. 명쾌한 명제에도 방법론마다 예민한 논쟁과 주의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필요한 문법의 첫 장은 언제나 보호와 독려다. 그토록 단순한 사실조차 구구절절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어른도, 인간도, 무엇도 아닐 테다. 그저 지구에서 가장 썩은 내를 풍기며 부패하고 있을 뿐.




@출처/ 

Les malheurs de Sophie, Comtesse de Sophie Ségur, 1858, 일러스트 호레이스 가스텔리 Horace Castelli


@커버 이미지/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 세계문학 22권 프랑스 편, 소피 이야기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유경환, 일러스트 다카하시 마코토 高橋真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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