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그리고 메이와 함께하는 두 번째 수업이다. 어제는 오는 길이 낯설고 그리고 중간에 다른 업무가 있었던 관계로 오전과 오후 수업 모두 조금씩 늦게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부부와 함께 한 수업이 감사할 정도로 좋았기 때문이다. 다시 아름다운 음률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번처럼 슈베르트 풍의 잔잔하고 서정적인 느낌이 아니라 좀 더 명랑하고 유쾌한 동요에 가까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이제 무엇인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다행이다.
집시의 수업은 더할 나위 없었다. 그동안의 오랜 영어 교육 경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업이었다. 아이의 반응을 살펴가며 탄력적으로 수업의 세부 내용을 결정하고, 아이의 수준에 맞춰 적절한 예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여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하며, 무엇보다도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아이가 어렵지 않게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성량이 풍부한 집시의 명확하고 또렷한 발음은 가벽 너머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올 정도로 이해하기 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집시와 함께 영어수업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집시가 아이를 데리고 레지던스 주변을 돌면서 현장 중심의 영어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의자에 앉아 말로 배우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직접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했다. 사실 면접을 목적으로 마련된 첫 만남에서도 집시는 과거 미국에서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진행했을 때도 현장 수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큰 교육적 효과를 얻었다고 했다. 표현하는데 특히 소극적인 우리 아이의 영어를 위해 반드시 생동감 넘치는 즐거운 수업이 필요하다면서 현장에서 다양한 상호 소통이 가능한 영어학습을 병행할 것을 나에게 제안했었다.
문제는 한국에 있었다. 강화도에 계시는 두 할머니는 항상 아이가 걱정이신 분들이다. 딱히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 어설픈 애엄마와 단 둘이 (그 무섭다는) 필리핀에 한 달이나 가 있는다니 두 할머니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그때부터 밤낮 없는 고문이 시작되었다. "무섭다는데 거기를 왜 가느냐." "절대로 아이한테서 눈을 떼지 말아라." "아이와 한시도 떨어져 있지 말아라." "절대 영어 과외선생과 아이를 둘만 놔두지 말아라."...... 귀에서 피가 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이때 알 수 있었다.
아이와 집시가 밖으로 나간 뒤 나는 환각을 경험하는 것처럼 붉은 얼굴로 노발대발하시는 강화도의 두 할머니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별일이야 없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레지던스 단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니까. 빈 집에 혼자 앉아있으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지금이라도 따라 나가야 하는 건가? 내가 옆에 있으면 수업에 방해가 되겠지. 지금쯤 재미있게 수업을 하고 있을까?... 일단 이 일은 한국 가족들에는 비밀로 해야 할 것 같다.
안전한 단지 내 환경
집시와 아이는 1시간 30분 만에 돌아왔다. 아이가 들고나간 공책에 연필로 삐뚤빼뚤 눌러쓴 새로운 단어들이 빽빽했다. playground(놀이터), swing(그네), stairs(계단), swimming pool(수영장)... 나열된 단어만 읽었는데도 둘의 동선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책상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 바깥에서 영어 수업을 한 아이는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다행이었다. (휴, 살았다.)
단지 내 상가 "그레이스 몰"
메이(May)
사실 메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와 각별한 인연이 있던 개가 있는데 그 개 이름도 메이였다. 몰티즈와 치와와의 혼종으로 추정되는 하얗고 자그마한 메이는 내가 2005년 중국 베이징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 룸메이트와 함께 새로 들인 가족이었다. 5월에 태어난 이 강아지에게 '메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큰 힘이 되었다. 룸메이트와 따로 살게 되면서 나는 메이와 헤어지게 되었고, 이후 메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또 다른 유학생에게 맡겨졌다. 그 유학생은 나의 중국 유학생활 중 가장 친한 벗이기도 했다. 나는 그 사이 한국으로 돌아와 첫 번째 박사학위를 얻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계획이 중국 박사학위였기 때문에 2011년 나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때도 메이는 나를 가장 기쁘게 반겨주었다. 신기하게도 메이는 나를 잊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박사학위를 얻은 친구는 메이와 함께 귀국길에 올라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대전에 정착했다. 나도 2014년 무사히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가 가끔 대전에 들러 친구와 메이를 만날 수 있었다. 정말 고마운 인연이었다. 그런데 그 메이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보고 싶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
오래된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는 그리운 메이
집시와 메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 하며 반가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당신의 이름이 내가 사랑했던 개의 이름과 같아요. 당신처럼 5월에 태어나서 그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똑같아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특별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에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워싱턴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분들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나와 아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만나게 된 것을 기뻐했다.
메이는 예상대로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사람이었다. 아이에게 끊임없이 격려와 칭찬을 해주었고, 그 덕에 쉽게 마음을 여는 아이가 아닌데도 금세 까불거리며 감정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영어 수업 경험이 없고 워싱턴에서 돌아온 후 몇 년간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느껴졌다. 크게 상관없었다. 집시와 보완하며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또한 메이의 따뜻하고 풍부한 감정 표현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는 문법 이상의 것으로 결국 감정 전달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의 영어 실력은 결코 정교한 문법을 논할 때도 아니다.
메이는 수업이 끝난 뒤 나와 대화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우리 둘 다 애엄마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현재 상황에서 가족과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나가야 한다는 삶의 방향성도 비슷했다. 대화의 주제는 실로 다양했다. 메이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양쪽 팔을 내밀어 보여주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와 대화하면 몸에 닭살이 돋는다고 했다. 아마도 그녀가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감정을 나누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늘처럼 아무 문제없이 물 흐르듯 편하게 지나갔던 하루가 있었나. 이렇게 멋진 날을 보낼 수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