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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Oct 24. 2019

27일: 짝퉁 베니스라도 괜찮아

마카오에 이어 마닐라에서 만난 작은 베니스

D-day 4

스무 번째 영어수업...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계획에도 없던 마닐라로 야반도주하듯이 갑자기 오게 된 이유가 대책 없이 방치하고 있던 아이의 영어교육 때문이었다. 이제 영어수업은 단 한 번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금까지 딱 스무 번의 영어수업이 있었고, 매 수업마다 3~4시간씩 (준) 원어민 선생님과 밀착 수업을 진행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눈에 보일 정도의 변화는 없다. 다만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간에 주변에서 들리는 영어를 편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모르는 문장이라도 꽤나 집중해서 듣고는 아는 단어 몇 개를 연결시켜 전체 맥락을 유추하는 눈치(혹은 감각)만큼은 대단히 좋아졌다.


가만 보자... 그리고, 발음을 정확하게 내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f발음이나 v발음을 튀지 않게 한국식으로 애써 서툴게 내던 것을 이제는 버터를 혀에 휘감았는지 뻔뻔스럽게도 rrrr~ 굴러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익숙하지 않은 영어에 더 이상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된 건 정말이지 다행이다.


생각보다 가까운 베니스

작년 2018년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으로 마카오를 선택했고, 이 여행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엉엉엉) 이때 가능한 예산 범위 안에서 처음으로 가장 큰 목돈을 호텔에 사용하였다. 쉐라톤 그랜드 마카오 호텔의 이그제큐티브 디럭스 스위트(Executive Deluxe Suite)에서 2박을 묵었다. 이름도 복잡한 이 객실의 전망은 놀라웠고, 그 넓은 응접실과 영화감상실 그리고 쓸데없이 컸던 대리석 화장실은 우리 같은 서민 나부랭이들에게는 과했다. 우리 세 가족은 침대 아니면 소파에 밍크들처럼 딱 붙어 앉아 휑한 공간을 바라보며 "와, 여기 진짜 좋다." "와, 여기 진짜 넓다."라는 감탄을 늘어놓았었다. 


마카오는 옛 건축물들이 아름다운 구도심과 고급 호텔이 밀집되어 있는 신도심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당시 우리 세 가족은 호텔과 쇼핑몰이 화려했던 코타이 부근에만 머물렀다. 여러 호텔 중에 베네시안 호텔은 베니스의 풍경을 실내로 옮겨와 쇼핑몰 사이로 수로가 흐르고 그 위로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가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기억이 선명하다. (완만하게 둥근 아치형 천장은 파랗고 하얀 페인트를 이용해서 가상의 하늘을 연출하고 있었는데, 그 파랗고 하얀 천장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갑갑했다)


마카오 베네시안 호텔에 구현된 베니스의 풍경


마닐라를 떠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영어수업을 마치자마자 미적대는 아이를 재촉하여 집 근처 맥킨리 힐(McKinley Hill)의 베니스 그랜드 카날(Venice Grand Canal)에 가보았다. 이곳은 마카오에 재현되었던 가공의 베니스 풍경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다만 마카오는 실내였었고 여기 맥킨리 힐의 베니스 그랜드 카날은 야외 공간이다 보니 조금 더 현실에 가까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롯데월드까지는 아니고 민속촌 같은 느낌이랄까.


맥킨리 힐은 고급스러운 주거 단지가 모여있는 곳으로 바로 이곳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있다. 대한민국 대사관 바로 뒤편으로 한국 국제학교가 있고 그 뒤로 일본 국제학교와 중국 국제학교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국어나 중국어로 된 간판이 많이 보이는 것이 이 지역은 주재원이나 외국인들이 모여사는 (한국의 서래마을 같은) 동네인 듯했다. 여기라면 어린아이와 함께 단 하나의 불편함도 없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로 십여분이면 도착하는 이곳에 오니, 갑자기 그레이스 레지던스와는 완전히 다른 동네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꽤나 규모가 컸던 베니스 그랜드 카날은 복합 쇼핑몰로 슈퍼마켓을 비롯하여 다양한 식당과 카페, 상점들이 있었다. 건물 안쪽으로 다시 바깥과 연결되는 문이 있었고, 그 밖으로 길게 이어진 수로가 화려한 조명 아래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 여기 마카오구나!" 슬프게도 아직 이탈리아를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마카오의 베니스'가 내가 경험한 유일한 베니스였다. (어렸던 내가 진짜 멜론을 먹고, "이거 메로나 맛이잖아!"라고 놀랐던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마닐라에서 만난 또 하나의 베니스
곤돌라 위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관광객들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 놀라웠다. 아이의 손을 잡고 쇼핑몰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니 방문객의 다양한 니즈에 잘 맞춰진 곳이었다. 지하의 슈퍼마켓과 스타벅스, 커피빈 등 다양한 브랜드의 카페는 주변 거주자들의 가벼운 방문에 적합했고, 영화관과 함께 저렴한 가격의 푸드코트는 젊은 직장인들이나 어린 친구들이 편하게 즐길만했다. 그 외에 여러 나라의 음식을 제공하는 고급 레스토랑도 다양하게 입점해 있어서 정찬을 원하는 손님들에게도 적합했다.


다양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깔끔하고 세련된 푸드 코트
저렴한 가격의 필리핀 음식


마침 배가 고파진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나보다도 우선 아이가 잘 먹을만한 메뉴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고기 브라더스'라는 익숙한 간판을 보고 고민 없이 들어갔다. 삼겹살 2인분을 주문하고 공깃밥 하나와 망고 생과일주스를 추가했다. 일단 한국식으로 깔리는 밑반찬들이 반가웠고, 직원이 와서 삼겹살을 직접 구워주는 친절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는 익숙한 모습의 반찬을 하나씩 맛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젓는다. 생긴 건 똑같은데, 무엇인가 맛이 다르단다. 그리고 그 다른 맛 때문에 비위가 상해 반찬을 먹을 수 없다면서 고기가 익을 때까지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흥정을 걸어왔다.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간만의 외출을 망치기 싫어 아이에게 와이파이 전용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한식 상차림


생각보다 삼겹살 2인분의 양이 적은 듯했고, 또한 고기의 색깔이 좀 거슬렸다. 그래도 유명한 브랜드의 식당이니 본사에서 식재료 관리를 잘하려니 믿고 구워진 고기를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몇 점을 먹더니 못 먹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언성이 높아졌다. "네가 삼겹살 좋아해서 여기 온 거야! (엄마는 사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샐러드를 곁들인 오일 파스타를 먹고 싶었던 말이다!!! 이 녀석아!) 밥을 잘 먹어야 키도 크고 건강해진단 말이다!" 이 말에 아이는 삼겹살이 너무 짜서 먹을 수가 없다고 했다. ...뭐라?


적당한 크기의 삼겹살을 집어 먹어보니, 세상에... 이건 염장 수준이었다. 빛바랜 고기 색깔도 소금에 절여서 그런 모양이었다. 극강의 짠맛을 뚫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돼지 냄새도 놀라울 뿐이었다. 결국은 내가 (봉사료까지 포함된 비싼 음식 가격을 생각해서) 억지로 몇 점을 더 먹고, 아이는 맨밥을 망고 주스와 함께 삼키며 참으로 아쉬운 저녁식사를 마쳐야만 했다. 


오늘의 교훈,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라. (아들과 단 둘이 오붓하게 아름다운 밤 풍경을 즐겼다면 맛있는 식사 한 끼 정도는 포기할 수 있다... ㅠㅠㅠ)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준 짜고 짜고 또 짰던 (게다가 냄새까지 났던) 불고기 브라더스의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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