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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Feb 25. 2024

설 연휴를 지나며 느낀 것.

“과거 나였던 소년은 과연 떠나고 없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있는가?” 

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구절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은 무릇 한결같아야 하고, 상황과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비겁하다 생각해 왔다.

새해를 맞아 모인 아버지 남매들 사이에 우연히 자리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며 여느 대한민국의 대가족이 그렇듯 다양한 입장과 상황 속에 갈등과 반목은 쌓일 대로 쌓였건만, 삼촌은 여전히 내가 어렸을 적 나보다 큰 형들과 맥주를 즐기던 때를 회상하며 나와도 함께하기를 권했다. 마치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나는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청정지대인 것 마냥. 

다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부모 세대의 싸움은 무시하기에는 너무 비대해졌고, 어린 시절 사촌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암묵적인 어색함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워 가족을 찢어발긴 지 오래였다. 이미 숭숭 뚫린 망사 구멍에 조명을 비춰 휑한 현실을 비춰버린 것에 가깝겠지만.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번에는 외가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 함께 하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어머니의 자매들, 그리고 나의 이모부들 사이에 나 홀로 자리하게 되었다. 자매의 대들보 역할을 하시던 큰 이모는 어느새 내가 어릴 적 가끔 뵙던 외할머니가 되셨고, 큰 어른이 모두를 어우르던 명절 모임은 어느새 막내 이모와 이모부가 형님들을 대접하는 식사자리가 되었다. 

이모부는 집안의 엔터테이너였다. 어렸을 적 쉴 새 없이, 은근히 선을 넘는 재담으로 모두를 즐겁게 하시곤 했고 심지어 친할머니마저도 이모부 안부를 간간히 묻곤 하셨다. 하지만 그 재담꾼이 20년이 지나, 환갑이 되신 분이 여전히 같은 레퍼토리를 고수한다면 그는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탑골공원 어르신이 될 뿐이다. 

인생의 마무리를 이야기하시던 어른들 앞에서 그런 재미없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시거나,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으며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이모와 이모부들 뒤에서 음악을 시끄럽게 틀며 손윗동서에게 가무를 시키며 음담패설을 일삼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연실색했다. 

4시가 되면 차가 밀리기 전에 올라가자던 큰 이모부는 5분이나 지났을까,
그만 올라가자고 하시며 자리를 파하셨다.
어쩌면 주변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지켜내는 사람은 극도로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다.
모두가 변하고 쓰러지는 동안 나 자신만을 돌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호기로운 여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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