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을 하며는
이전 회사에서는 입사 연도에 따라 기수제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회사에는 그런 게 없다. 대부분은 신입이 아니라 경력으로 입사한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동갑내기 친구들이 된다. 원래부터 친했던 몇몇 85년생들을 중심으로 기획실 85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기획실 전체 인원은 약 4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 85가 7명이나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직은 주니어 티를 벗지 못한 사원들이었는데, 이제는 경력이 5~10년 차가 되는, 한 조직의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우리 중에서도 팀의 리더나 조직장이 생길 거라 생각하니, 새삼 지난 시간들의 무게가 느껴졌다.
어쨌든 기획실 85 모임이 본격적으로 생기고, 첫 모임을 갖게 되었다. 멀리 가기에는 다들 바쁜 시기라서 회사 주변에서 고기를 먹고, 맥주 한 잔씩 하기로 했다. 여자 넷, 남자 셋.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나이만 같을 뿐 개성은 제각각인 일곱 친구가 처음으로 다 같이 모였다.
이미 친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소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던 이들도 있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우리끼리는 무조건 말을 놓고, 존댓말을 하면 천 원씩 벌금을 내기로 하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져 갔다. 과하진 않았지만 술도 조금씩 들어가니 더욱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회사 사람들이다 보니 대화의 시작은 회사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내 자리가 무르익어 갈수록 주제는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이른바 '깔때기 이론'. 결국 모든 모임과 술자리의 이야기는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으로 귀결되는 법이다.
우리 중 여자 둘은 결혼을 했고, 나머지 다섯은 미혼이었다. 확실히 요즘 결혼이 늦긴 한가보다. 서른셋의 나이에도 절반 넘는 사람들이 미혼이라니 말이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이별을 했고, 한 명은 최근에 연애를 시작했다고 한다. 서로의 소식에 업데이트가 늦은 이들도 있어서 축하와 위로를 주고받았다. 결혼한 친구들은 결혼 생활에 대해,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여전히 고민인 사랑과 연애에 대해. 어쩌면 가장 비슷한 시기를 살아왔고, 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우리이기에, 그 어떤 모임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새벽 1시쯤 내일의 일과를 위해 마무리하고 집에 가려는데, 밖을 보니 빗줄기가 더 세졌다. 봄비라기보다는 한 여름의 집중 호우처럼 막 내리고 있었다. 집이 좀 먼 친구들은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갔다. 나는 집이 회사 근처라서 걸어갈 참이었다.
- J, 너는 어떻게 갈 거야?
J는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한 여자 친구이다.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우기지만, 경남 사투리 억양이 짙게 남아 있어 항상 놀리곤 한다. 그녀의 집은 택시를 잡아 타기에는 너무 가깝지만, 장대비를 뚫고 걸어가기에는 너무 먼, 애매한 위치였다.
- 어, 남편이 데리러 올끼다.
- 아, 남편이 이 시간까지 너 기다리고 있어?
- 아니, 자고 있는데... 전화 해 봐야지. 있어봐라.
가게 앞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거는 그녀.
- (전화) 자나? 나 지금 막 끝났는데, 비가 마이 오네. (...) 어, 어. 아이다 자라. 걸어 갈게 (...) 어, 어~ (끊음)
- 남편 자고 있었나 보네. 같이 걸어 가쟈.
- 아, 잠만 있어봐라.
- 응?
- 3분 내로 다시 전화 온다.
- 뭐어?
- 우리 남편 내가 잘 알지, 인나서 내 데리로 올 거다. 있어 봐라.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새벽 1시에 자던 사람에게 전화해서, 방금 걸어간다고 하고 지가 끊어놓고는, 다시 전화가 올 거라니?! 남편도 내일 출근을 해야 할 것이고, 분명 자기 입으로 괜찮다고 말했으면서 무슨 확신을 가지고 저렇게 얘기를 하는지?
그런데 나의 이런 의구심이 해소되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 (지이이잉) 어, 남편, 왜?(...) 지금 온다고? 어, 나 인순이네 근처지. 알았다. 기다리고 있을게 조심히 와용~~♡
- 헐...
- 봤제? 백퍼 온다니까 ㅋㅋ 내가 우리 남편을 아주 잘 알지, 훤하다 훤해
회사에서는 누구보다도 야무지고 빈틈없는 그녀인데, 그렇게 사랑하는 이에 대해 확신에 찬 얼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몹시나 낯설고도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 그래. 이게 바로 사랑받는 이의 표정이지.
나도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저런 표정으로 살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빗속을 걸어오는 내내, 내 친구 J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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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