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력(家族歷) [명사]
환자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같이 사는 사람들의 의학적 내력.
제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무렵, 그러니까 90년대 초반이네요.
아빠는 당시엔 흔치 않았던 '컴퓨터'라는 물건을 집에 들여놓으셨습니다.
그 컴퓨터의 이름은 '286'이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한아름에 들기도 어려운 흑백 모니터와 시끄러운 소리가 나던 도트 프린터까지.
이 컴퓨터라는 녀석들이 큰 방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 흑백 화면 앞에 앉아 항상 '훈글'이라는 프로그램을 켜놓고 무언가를 하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래아한글 워드프로세서였지요.
그리고 제가 9살이 되던 해에, 아빠의 첫 시집 <매를 때리고 나서>가 나왔습니다.
시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아빠가 낸 책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시는 당연히 저와 제 동생이 등장하는 시였어요.
책 속에 내 이름이 담겨 있다니! 그게 마냥 신기하고 놀라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빠는 이듬해 <잘려진 가로수에는 꾀꼬리가 살까>라는 시집을 한 권 더 내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남다르고, 만화를 좋아했던 여동생.
어느 날 동생의 자취방에 가보니 입구부터 박스가 가득했습니다.
뭔고 했더니 동생이 스스로 책을 만드는 독립출판을 했다고 합니다.
책의 제목은 <고양이의 크기>.
대사 없이 모두 일러스트만으로 이루어진 책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고양이의 크기>를 낸 과정을 담아 4컷 만화집 <책 낸 자>를 출간하였습니다.
아마 독립출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서귤 작가를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책들은 입소문을 타고 타고 많은 분들께 읽혀서
<책 낸 자>는 디자인이음에서, <고양이의 크기>는 이후북스에서 재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 다 정말 정말 재미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고양이의 크기>를, 책과 독립출판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책낸자>를 절대 놓치지 마세요!
홍대의 핫하다는 서점들을 가면 서귤 작가의 책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올해, 제가 첫 책 <서른의 연애>를 출간하였습니다.
'책'이라는 꿈이 아빠로부터 동생과 저에게 대물림이 된 셈이지요.
이렇게 온 가족이 같은 꿈을 꾸는 걸 보니, 꿈이라는 것도 가족력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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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
서귤, <고양이의 크기>
서귤, <책 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