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생각들
지금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볼 때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삼십 대엔 그래도 비가 내릴 때면 비를 주제로 한 노래들을 떠올리기도 했었지요. 십 대 시절에는 안개비를 참 좋아했었습니다. 그보다 어릴 적에는 소나기를 무척이나 즐겼지요. 왠지 모르지만 비 오는 날을 예전에는 꽤 좋아했었습니다.
변두리 어느 동네에 살 때의 기억들 가운데 비와 관련된 추억들이 많습니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 이른 오후에 동네 친구들과 같이 근처 공터에 모래더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여기저기에 생긴 물웅덩이 사이에 물길을 만들어 돌멩이와 모래로 만든 댐을 세우고 이런저런 모양의 대롱 - 잡초가 되었건 아니면 빨대가 되었건 간에 - 을 돌멩이 댐 사이에 넣어 댐 수위 조절을 하며 놀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재료가 있는 날엔 배도 만들어 띄우곤 했었지요.
십 대 초반 미국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비에 대한 어릴 적 추억을 다시 되살리지는 못했습니다. 뉴욕시에는 비포장 도로 또는 모래가 깔린 공터를 아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한국에서 열 살이 되기 전 친구들처럼 그런 놀이를 같이 해 줄 친구도, 그리고 저도 그런 놀이를 할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그 누구나 그렇듯 십 대 시절의 감성은 주변 모든 것에 반응하는 것 - 그래서 그랬는지 비와 관련된 노래에 관심이 참 많았었습니다. 다만 American pop 엔 비와 관련된 노래가 많지 않지요. Bon Jovi의 November Rain 도 사실 감성이 짙은 비 이야기를 노래하는 곡도 아니고, Phil Collins의 I wish it would rain down 도 비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마도 Bruce Hornsby의 Mandolin Rain이라면 '비'의 정서를 제대로 불러낸 노래일 뿐, 그 외엔 바로 기억에 떠오르는 '비를 노래하는 American pop'은 없지요. 어쩌면 Whitney Houston의 Didn't we almost have it all 도 비 노래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반면에 한국가요에는 비 노래가 당시에는 많았습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를 기억하면 이문세 님의 "빗속에서" 또는 "끝의 시작, " 최헌 님의 "가을비 우산 속에, " 이광조 님의 "빗속에서, " 그리고 해바라기 이주호 님의 "빗속에서"와 "저 빗속으로" 등, 이 외에 제가 모르는 노래도 비를 소재로 한 곡들이 꽤 많지요.
미국생활 초반에는 이렇게 한국노래를 통해 감성을 키우기도 했고,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던 친구들이 가져온 카세트테이프에 담겨있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듣기도 했지요. 그때 들었던 (시그널 곡이라고 하나요?) Merci Cherie (by Franck Pourcel)이라는 연주곡을 처음 들었을 때 저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왔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런 기억 또한 너무나도 오래전 이야기, 예전이지요.
40년이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80년대 90 년대를 십 대 이십대로 살았던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80년대, 한국에서는 90년대 중반이 그렇지 않았을까요?
어느 노래를 듣고 몸에 소름이 돋는 사람은 감수성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었지요? 그렇다고 어느 예전 노래를 누군가가 멋지게 remake 해서 또는 revive 해서 부르는 경우는 예외라고 하더군요. 너무 pump up을 시킨 후 내놓은 곡들이 대부분이라, 원곡이 아니면 이 '소름현상'은 적용되지 않는답니다.
사십 대 중반까지는 이런 경험을 자주 했었지요. 하지만 왠지 이제는 '전율'이나 '소름'이 돋는 노래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아마도 몇 년 후에는 이런 경험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군요.
다시 한국입니다.
밖에는 비가 내리는군요. 역시 비가 내리는 밤길을 바라보아도 별 다른 감정의 변화는 없습니다. 며칠 전 BBC Earth에서 본 프로그램에서 어느 나이 드신 인디언 남자분이 "도시에 살면 모든 게 부정적이 되지. 주변에 부정적인 것들이, 사람들이, 일들이 많으니 그 누구도 부정적이지 않을 수가 없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도시에서 떠나 멀리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자연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순응하며 살아보라는 말씀을 하신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Mongolia의 Har Sair 가 좋을까요, 아니면 Russia의 Norilsk 가 좋을까요? 강원도 정선 동강 근처가 좋을까요? 비가 오면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아니, 찾아야만 할 듯합니다.
- October 15,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