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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Oct 16. 2015

#005. 퀸카로 살아남는 법

'나 자신'으로 살아남는 법

I had gone from home schooled jungle freak to shiny plastic to most hated person in the world to ACTUAL human being.

2학기에 감행하는 전학이 얼마나 끔찍한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서로에 대한 탐색기를 가지는 학기 초와는 달리 이미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똘똘 뭉쳐 본격적인 우정 다지기에 돌입한 1학년 2학기, 그때 나는 서울로 '유학'을 갔다. 내 고향 군산에서는 초등학교 친구들과 대거 같은 중, 고등학교에 갔기 때문에 학교라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 생애 가장 발랄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이었다. 수많은 친구는 물론이고 매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마중을 나가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교실로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학과 동시에 내 삶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나를 떠맡은 반장은 때마침 맞이한 교내 합창대회 준비로 바빠서  내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장 체육복을 빌릴 친구도 없었을뿐더러 서울 애들은 내가 내뱉는 '간복(춘추복)'이나 '꼼시럽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편을 나눌 때는 더 가관이었다. '데덴찌'라는 말을 듣는 순간 멘붕이 찾아왔다.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흰둥이 검둥이'였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주인공 케이디(린제이 로한)도 학교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그녀는 난생처음 학교라는 곳에 다니게 된다. 첫 등교 날, 교실에서 "안녕! 난 새로 온 학생인데 혹시 내 얘기 들었니?"라고 물었다가 "또 말 걸면 죽을 줄 알아"라는 차가운 일갈만 들으며 순탄치 않은 학교 생활의 전초전을 맞는다. 결국, 화장실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그녀의 모습은 매점이 어딘지 몰라 타는 목마름을 고스란히 감내하던 내 모습과 겹쳐진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점은 케이디(Cady)의 이름이다. 스펠링 때문에 선생님과 친구들은 그녀를 캐디라고 부르는데, "케이디야"라고 정정해도 "그냥 캐디라고 할게"라고 한다. 마치 전학과 동시에 내 이름이 성은 '전'이요, 이름은 '학생'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낯선 이들에게 나를 각인시키는 것, 집단에서 꾸역꾸역 한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임을 그때 깨달았다. 군산에서는 마냥 밝고 활달했던 내가 서울에서 조용한 애로 인식되면서 진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혼란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군산 친구들은 내가 변했다고 했다. 그 말이 결코 좋은 의미 같지 않아서 비수처럼 심장에 꽂혔다.


순진한 정글 소녀 케이디도 퀸카들의 모임 '플라스틱'에 합류하면서 점차 달라진다. 최고의 퀸카 레지나(레이첼 맥아담스)를 따라 암투와 이간질의 최전선에 뛰어드는데, 마침내 레지나를 물리치고 여왕벌의 자리까지 올라선다. 학교 스타로서의 유명세를 즐기는 그녀는 첫눈에 반한 초특급 훈남 아론(조나닷 베넷)에게 말을 걸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자신 있는 수학에서 일부러 낙제점을 받기도 한다. 레지나 복제품으로 전락했지만 하이틴 영화의 주인공답게 종국에는 현명하고 착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나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어쩌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들 자기 안에 다중이처럼 두세 개쯤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철이 든다는 의미는 나를 대신할 가면이나 자아를 몇 개 더 쟁여두게 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앞으로 사회인으로 성장하면서 가지게 될 또 다른 '나'들도 꽤 괜찮은 녀석들로 모아간다면, 문득 하나의 '나 자신'으로 소화했을 때 멋진 어른이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 순간의 내가 그냥 나일 뿐이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고 오늘도 왼다.

 


2012-11-25

내가 누군지 아직도 찾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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