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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지는 별 Jun 07. 2023

선생님 함께 걸어가시죠?

심리상담사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1

선생님... 5월의 날씨가 너무너무 환상적입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심한 몸살감기로 겨우 회생했네요.


아직 회복 중이어서 심한 식욕감퇴와 함께  무기력하고 차분한 생활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밥을 먹지 못해 기운이 없고, 더 깊은 무기력에 빠져들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기운을 차리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지금의 자연스러운 강제 다이어트와 조용한 하루하루를 뚜벅뚜벅 잘 걸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

요즘은 친정엄마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엄마가 올해 78세신데 이래저래 돈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늘 경제적으로 버거운 제가 어버이날이나, 매달 드리는 용돈이 비록 받아 쓰시는 어머니께는 얼마 안 되는 돈이겠지만 그 적은 돈도 매달 저는 갈등하며 송금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언니와 다투시고 저한테 전화를 해서 "계좌 불러라. 그까짓 거 안 받아도 되니까 보내주게"

라는 말을 듣고 얇은 실같이 연약하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가족이라는, 부모라는, 자식이라는 의무와 책임, 그리고 양심의 줄이 툭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괴팍하고, 이기적인 어머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표면적으로나마 그런 책임과 의무의 탈이라도 뒤집어 쓰고서라도 관계를 유지하며 살려고 노력했던 그 시간들에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 있나....

나이가 적지 않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과연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수나 있을까?, 너무 무덤덤해져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으면 더 곤란할 텐데 정말 그러면 어쩌나... 이런저런 생각이 자주 떠오릅니다.

 

얼마 전 노조에서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옆자리에는 방문간호사 때부터 알고 지낸 선생님과 함께 앉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색하지 않게 가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옆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데...'와... 저렇게 할 말이 많을까?, 무슨 말을 저렇게 끊임없이 할까?' 신기해하면서도 저는 선생님에게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생각해 내느라 무척이나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었어요.  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는 거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관계하며 사는 일이 무척이나 피곤하고,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다 삶이라고 받아들이면 좋은데 어차피 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끊어지고, 멀어지는 그 관계에 매달리며 사는 시간들이 자꾸만 무의미해 보이고, 피곤하게만 느껴집니다.  하긴.. 그 소용이라는 것도 미래지향적인 단어이긴 하네요.  왜...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뭐 이런 물음표들이 떠올라서 지금에 집중을 잘 못하고 지내는 것 같아요.

기대하지 않고, 기대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가 너무 길지만 그저 조용히 삶을 걸어가 봅니다.  


가영이가 어제 늦은 밤 전화를 했더군요.

미주알고주알 속속들이 자신의 불편함과 고민, 걱정, 일상에 대해서 톡을 하는데... 왜 엄마인 제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느냐는 가벼운 투정을 하더군요.  친정엄마든, 저의 자식이든 정말 내가 이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늘 그들에게 빚진 자처럼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관계에 기꺼운 마음까지 생기지는 않는 것 같아서 그냥 웃기만 했네요.

 

의무와 책임 속에 사랑도 있으면 훨씬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일이 부드럽고, 좋을 텐데... 부담감쪽으로 기우니 자주 불편하고, 피하고 싶고, 달갑지가 않은가 봅니다.  

아침에도 출근하면서 저를 가만히 들여다봤어요.  왜 그렇게 불편하고, 왜 그렇게 매사가 귀찮은 건지..

아마도 끌어올려지지 않는 감정과 에너지를 억지로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게 워낙 다양한 목적과 이유와 필요에 의한 것이겠지만 의도적으로 그 관계들을 다 쳐낼 수는 없는 것이니 멀어졌다가 또 조금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지내는 것이 관계이니 나 또한 그 완급을 조절하면서 살면 되겠구나... 뭐 이런 생각도 드네요.

하긴...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대로만 살 수 있겠어요...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많고,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은 세상인데... 싫고 좋음이 있어도 되지만 남들에게 그 감정을 들키지 않는 게 서로 편하게 사는 방법이겠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명상에서는 좋아함과 싫어함에 대해서 모두 버리라고 합니다.

그 판단조차도 없앤 상태가 나라고 가르칩니다.  너무 높은 이상이죠.  싫고 좋음을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부정하고, 외면하는.. 다소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과정이 저는 참 싫었던 것 같아요.

왜 싫어하면 안 되고, 좋아하면 안 되나?  지나치게 양극화되는 지점이 좀 중화되고, 그 호불호의 감정이 희미해지는 것으로 제 목표를 삼고 살면서 호불호가 덜 나눠질수록 삶은 편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네요.


선생님...

예전에는 수명, 삶을 개인의 숙제라고 생각했어요.  꼭 해서 제출해야 하는 숙제요.

물론 맞는 부분도 어느 정도는 있지만 삶은 순례길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길을 완주할 수도 있고, 중간에 포기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답안지 같은 거요..

꼭 완주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중압감보다는... 내가 왜 걷고 있는지,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복잡한 생각 없이 그냥 뚜벅뚜벅 흙먼지 길을 그저 걷는 것에 집중하면서 걷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요....


그래서 좀 삶이 편하게 다가옵니다.

예전에는 언제 가지... 언제 가지... 저 보이지도 않는 저 먼 곳까지 언제 가지... 늘 한숨 쉬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걷기도 했다가 잠시 쉬기도 했다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면서 그저 열린 길을 따라 쭉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막 헉헉대면서 빠른 걸음으로 재촉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산책하 듯 걸어가는 것....

어느 지점까지 왔는지, 어디까지 갈 건지, 어디에서 어디까지 몇 시간 만에 걸을 건지... 이런 생각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걸어가다, 잠시 멈추다를 반복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외부인 출입금지 기간인가 보다... 해 봅니다.

사람이든, 자극이든 외부의 것들은 모두 튕겨져 나가는 시간...

생각해 보면 재미없고, 지루하고, 너무 적막하기까지 한 이 시간이 내가 가장 편안해하고 좋아하는 시간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고요..


예전에는 사람도 너무 좋다가도 싫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주 귀찮거나, 좀 덜 귀찮은 존재정도가 된 것 같아요.

많이 좋아진 거라는 다행감도 드네요.

고요하고, 평화롭고 편안하니 좋네요. 선생님..

두서없이 이런저런 수다를 떤 느낌이네요.ㅎㅎㅎㅎ

우울감보다는 무기력함에 가까운 지금의 일상이 쓰고 보니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네요. ㅎㅎㅎㅎ


선생님..

두서없는 이런 글도 나눌 수 있어서 참 고맙고, 감사합니다.

존재함 만으로도 감사한 사람이 있다는 거 이 또한 너무 소중한 감정이네요.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저도 그런 존재겠죠?

  

오늘도, 내일도 그런 내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나 때문에 뚜벅뚜벅.. 오래오래 걸어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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