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산문 허송세월 책 리뷰 1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고 혼자서 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의 경계도 무너져서 뿌옇다. 웃음이나 울음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크게 나오지는 않고 바람만 픽 나온다.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사랑, 행복 같은 마음의 침전물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로되, 이 물컹거리고 들척지근한 단어들을 차마 연필로 포획할 수가 없어서 글로 옮겨 남들에게 들이밀지 못한다.
단어들도 멀어져 간다. 믿고 쓰던 단어에서 실체가 빠져나가서 단어들은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불려 간다. 단어의 껍데기들이 눈보라처럼 바람에 쓸려 가는 풍경은 뿌옇다. 부릴 수 있는 단어는 점점 적어져서 이제는 한 줌뿐인데, 나는 이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 김훈의 허송세월 43페이지에서 발췌-
유명한 작가지만 아는 게 별로 없어 이래저래 정보를 뒤적여 봤다.
30권이 넘는 책을 냈고 순탄하지 않은 기자생활과 지금까지 작가로서의 삶을 대충 훑어가며 지금 읽고 있는 문장의 담백함과 날 것의 느낌이 그의 글과 일맥상통했다.
책 뚜껑을 열고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80에 가까운 그의 나이에 대한 노쇠한 감각과 기억력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 가고 있다.
단순히 엄살이라고 하기엔 너무 디테일하고 솔직하며 솔직함을 넘어 대범하기까지 하다.
그러한 대범을 대변하는 글귀...
'나는 이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
다양한 감정과 감성을 잡아내기도 흐릿한 감성을 감퇴하고 있는 기억력 속에 남아 있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고백하는 글귀다.
아무리 멋들어진 글을 쓰려해도 잡히지 않는 단어들과 가까이 곁으로 다가와 주지 않는 감정들의 정체들에게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짐작해 본다.
내가 가진 것이 이것뿐이니 이것으로라도 한 줌의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인간미로 다가온다.
나도 한 때는 유려한 글들을 보며 내가 가진 단어와 어휘의 빈약함을 탓하며 글쓰기를 멈추었던 시간이 있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고, 내 글을 못난이 취급했었다.
하지만 글은 나의 나이와 상황, 조건들을 모두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단순히 비춰주는 것도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그만큼 나 스스로에 대한 관심으로 나에게 집중하는 일이니까.
작가의 글을 보며 조용히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비춰보고 말갛게 한 움큼 끌어모아 글로 담아내보기로 결심하게 한다.
그 글이 비록 부족하고 가난하여도 가난하게 사는 것 또한 삶을 사랑하는 방식임을 깨닫게 하는 글귀다.
모든 것이 반짝이고, 멋들어질 필요는 없다.
삶도 가난한 인생이 있고, 부유한 인생이 있듯 글도 각자의 인생에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내가 가진 것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내 주머니 사정 그대로 나오는 말과 글에 같은 주머니를 지니고 삶을 살아내는 이와 같이 하는 삶이 진솔한 삶이고, 거짓 없는 글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