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대학교 졸업식 사진 촬영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차려입은 부엉이 블라우스에 스커트, 평소에 잘하지도 못하는 전문가의 손길이 담긴 메이크업이 오늘 이 날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공항에서 만난 우리 둘을 깜짝 놀라게 한 운명적인 일이 일어난다.
한국에서 한 달간 데이트를 하면서 완전히 마음이 뺏겨버린 한 남자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 명의 이성을 알기에 턱 없이 충분하지 않은 한 달이란 시간이었다. 어떤 사람일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타오르는 좋아하는 감정 하나만 믿고 타국까지 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떻게 서라도 하고 마는 나를 잘 알기에 필리핀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결정을 아마 엄마는 믿고 지켜보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헤어지는 마지막 날, 그가 남기고 간 귀고리와 편지의 의미가 컸다. 손글씨로 가득 채운 2장의 편지지 내용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이 사람도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듯이 서로 오래 볼 사람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은 건 아닐까?라고.
한국에서 만났지만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나의 미국인 남자친구, 못 보는 몇 달 사이 매일 그 사람만 생각나고 다시 보는 날이 오기까지 날을 손꼽았다. 몇 달 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이 있었지만, 다시 만나게 될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공항의 혼잡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나를 발견할지, 혹시 나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라는 걱정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그 모든 생각은 그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사라졌다.
묵직한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는 그 순간, 모든 기다림과 불안이 씻겨 내려갔다.
그를 보자마자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맞춘 것도 아닌데 부엉이가 그려진 블라우스를 똑같이 입고 나타난 것이었다.
필리핀에서의 재회는 한국에서의 첫 만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더 깊어진 감정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눈빛만으로도 전해졌다. 거리는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만, 그 거리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어졌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이 생활하는 곳곳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우연일지라도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낯선 땅에서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함께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를 가졌다. 이 특별한 만남이 우리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장거리 연애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앞으로 함께할 미래를 그리며 하나씩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고 싶었다.
한국과 필리핀의 거리가 길지도 짧지도 않기에 장거리 연애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길고 긴 진짜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때로선 이 연애가 7년으로까지 이어질지는 예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큰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용기를 얻었다.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면서 지칠 때가 많았지만 결코 물리적인 거리에 의해 우리 사이가 제한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만날 사람은 언제가 다시 만난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걸어가는 이 길이 결국은 우리를 더 가까이 연결시켜 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야속하게도 그리움은 계속 쌓여간다.
7년간의 해외 롱디를 거쳐 2020년 12월 연을 맺은 미국-한국 국제부부입니다. 두 사람의 출신지인 부산과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벗어나 말과 버번 보드카가 유명한 켄터키 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낮에는 트레이더 조스 마트에서 근무하며, 인스타툰, 아크릴화를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국제연애의 에피소드와 생동감 넘치는 미국 일상을 에세이 단편 형식으로 장기 연재합니다.
즐겁게 감상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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