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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쥬 Mar 25. 2024

엄마아빠, 우리 집은 왜 가난했었나요

아주 깊은 곳에 숨겨놓은 어린 시절의 기억 조각

내가 태어나보니 우리 아빠는 서울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교회의 목사였다. 나는 교회에서 늘 아빠 옆에 딱 붙어있는 껌딱지 목사 딸로 유년기를 보냈다.


엄마는 아빠 대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처녀 시절 간호조무사였던 엄마는 세탁소, 학습비디오 대여점, 음식물처리기 사업 등 엄마의 역량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많은 사업을 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바쁜 엄마 대신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참 많이 놀러 다녔다. 날씨가 좋은 날은 마니산에 갔고, 안 좋은 날은 63 빌딩에 놀러 갔다. 아빠 손을 잡고 마니산에 올라가면 어른들이 나를 보며 어린아이가 산을 잘 탄다며 한 마디씩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그 칭찬이 좋아 더욱 씩씩하게 올라갔다.


초등학교에 입학 후 우리는 서울에서 김포로 이사를 갔다. 그때 엄마는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서 학습비디오대여점을 시작했고,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엄마, 아빠를 따라 서울-김포로 출퇴근을 했다.


나는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이 부유하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의 집과 비교하면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우리 집 경제 사정을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내가 10살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집은 거실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의 작은 거실과 방 2개짜리의 허름한 빌라였는데, 친척이나 조부모님 없이 우리 세 식구만 온전히 한 집에 살게 된 첫 번째 집이었다.


집은 빈번히 전기, 가스, 유선전화가 끊겼다. 한 번은 친구가 놀러 왔는데 전화요금을 내지 않아 전화가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친구 앞에서 수치스러웠던 감정은 어른이 된 이후에도 떠올라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를 낸다.


본격적으로 우리 집의 경제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시기는 IMF 직전이었다. 아빠의 음식물처리 아이디어가 특허를 받아 여러 회사와 계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에 부푼 아빠가 나에게 먼저 영국유학을 제안했던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IMF의 충격은 우리 집도 비켜갈 수 없었다. 모든 계약이 물거품이 되었고, 우리가 품고 있던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사라진 희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엄마, 아빠에게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부모님은 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 더 용감했고, 한편으로는 무모했다. 중국에서 다닐 학교조차 알아보지 않고 엄마는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중국행 티켓을 끊었다. 엄마와 나, 중국 유학길에 오르던 그날이 우리 모녀가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이국땅을 밟았던 날이 되었다.


바라던 유학을 드디어 가게 된 철없는 열다섯 살의 나는 무척 신났었지만, 현실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첫 번째 중학교는 기숙사 시설이 너무 열악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웠고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양말을 세 켤레를 입고 자도 발이 시렸다. 샤워시설이 없어서 주중에는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매주 목요일에만 뜨거운 물이 나왔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 피부가 빨갛게 익을 정도였다.


어느 날, 아무 연락도 없이 아빠가 학교에 방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빠는 뒷짐을 지고 서서 눈물을 훔치셨는데 그때 나는 아빠가 왜 우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다음 해, 나는 국제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전에 있던 학교가 워낙 열악했던지라 새로 전학한 학교는 마치 궁궐 같았다.


어른이 된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국제학교 전학은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나를 보고 아빠가 너무 미안했던 나머지 큰 결심을 한 것이라고 한다. 국제학교 학비가 너무 비싸서 학비를 내야 할 시기에 엄마, 아빠가 돈을 구하느라 항상 진땀을 뺐다고 한다.


용돈은 항상 불규칙적으로 들어왔다. 어느 달은 넉넉하게 어느 달은 부족하게 들어왔다. 나는 그걸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돈을 아껴 썼다. 용돈이 떨어져 부모님께 부탁하면 느지막하게 돈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나는 수중에 돈이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에 여유 있게 부모님께 용돈을 부탁하는 습관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가서는 한국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그때도 부모님은 홈스테이 비용을 제때 주는 법이 없었다. 가끔은 두세 달 치 홈스테이 비용을 밀리는 달도 있었는데 나는 그걸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대하는 태도와 말투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부모님의 청춘과 젊음을 소비하며 값비싼 유학생활을 대학교까지 이어나갔다. 대학교 때도 난 부모님이 꼬박꼬박 보내주는 학자금과 용돈으로 풍족한 4년을 보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싶어 과외 알바를 했던 게 내 경제활동의 전부였다.


서른 후반 남짓, 늘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는 나의 학창기를  돌이켜보니 난 결코 가난하지 않은 풍요로운 세월을 지금껏 보냈다. 아빠의 서재는 늘 책이 많았고,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 아빠를 따라 난 책을 즐겨 읽는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아빠는 날 미술관, 박물관을 데리고 다니며 내가 보지 못하는 넓은 세상을 보여주셨다.


엄마는 늘 배우는 게 남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배우고 싶다고 하면 없는 형편에도 부족함 없이 다 하게 해 주셨다.


중국유학기간에는 대기업 주재원 자녀들이 회사돈으로 보내는 국제학교에 나를 입학시키고, 그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 경험이 나에게 얼마나 큰 자산으로 남았는지 알 수 있다.


부모님은 알았던 것이다. 무엇이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지, 어떤 것이 사람을 가난함 속으로 밀어 넣는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늘 불만이었다. 아빠는 왜 똑똑한 머리로 대학원까지 나와 돈도 못 버는 목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그런 아빠를 엄마는 무엇이 좋아 결혼까지 하고 이리도 고생을 하는지 말이다.


아빠는 IMF이후 결국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가난함’에서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사업의 영광은 지금까지도 누리지 못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선택한 탓에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젊은 시절 꿈꿨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젊고 패기 넘치던 서른 살의 아빠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길 소망했을까.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나는 깨달았다. 과거 우리 가족의 가난함은 부모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고, 놀랍게도 부모님은 딸이 가난해지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그 덕분에 현재의 나는 매우 풍요롭다. 모든 것이 가난함을 물려주지 않으려 처절하게 노력하셨던 부모님 덕분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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