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집회 참여기
저기가 너희 엄마하고 아빠가 일하다가 처음 만난 곳이란다
젊은 아버지가 다섯 살 남짓 돼 보이는 아들에게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바라본 곳은 세종문화회관, 그곳은 시민들의 촛불로 빛나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에 아들의 목소리가 들떴다. 그리고 둘은 오래된 친구처럼 재잘재잘 이야기를 이어갔다. 12일 저녁 광화문 광장은 시민들의 분노가 결집한 집회의 장소였지만, 따뜻한 기운이 넘쳐났다. 본 무대에서 진행된 자유발언대 마지막 발언이 끝나자 사회자가 “집에 가실 분들은 가고, 1박 2일 하실 분들은 함께하자”고 외쳤다. 젊은 아버지를 보며 아들이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집에 안 갈래.” 그 어린아이도 이날 광화문 광장을 떠나기 아쉬워했다.
지난 주말 찾은 시청 광장은 촛불로 빛나고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29년 만에 최대라는 100만 명의 인파가 거리에 가득했다.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배우, 개그맨, 가수, DJ도 시위에 동참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구호, “박근혜는 하야하라, 대통령직 사퇴하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외치고 있었다. 표정은 밝았지만 있는 힘껏 내지르는 목소리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들의 외침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시민들이 만든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행진했다. 내가 알고 있던 광화문 광장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수많은 빌딩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라 여겨 더 가슴이 끓어올랐다.
분노, 시민들이 느끼는 이 감정은 당연하다. 누군가는 대통령을 믿고 뽑아줬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참고 참다가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분노가 차오른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지나친 이 문장 속의 가치는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됐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은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최순실 씨로 대표되는 소수 집단에 있었다. 대통령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국정 운영 체계를 무시했다. 이로 인한 피해는 선량한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기업들이 권력에 돈을 대는 동안, 힘없는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비정규직은 늘어났다. 청년실업은 사상 최대로 증가했고 가계부채는 여전히 줄어들 생각을 안 한다. 국가는 국민의 고통에도 무관심했다.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는 아직도 바닷속에서 진상 규명을 기다리고 있고, 공권력으로 쓰러뜨린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1960년 4월 혁명과 87년 6월 항쟁에도 대한민국 사회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29년 만에 다시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외칠 때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더 높은 성장과 발전을 위한 첫걸음이다. 아주 간단하게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나와 사과하고 물러나야 한다. 새누리당도 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야당은 주도권에 욕심내기보다 민심을 읽고 좌초된 정국을 끌고 나가야 한다. 언론은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 시민들은 계속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지난 주말, 100만 개의 촛불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간절한 바람이다.
밤 10시가 넘어가자 광화문 광장은 전보다 한산해졌다. 스크린을 통해 가수 이승환의 노래가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는 아무 말 없이 촛불을 바라보거나 어딘가를 응시하기도 했다. 나는 저 멀리 이어진 광화문 대로를 바라봤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소속감이 생겨났다.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라는 소속감, 그리고 광화문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자부심이 가슴속에 가득 찼다. 나는 다짐한다. 다음에는 더 일찍 이 곳에 나와 즐길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있는 힘껏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 바로 우리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