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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민 May 15. 2016

그해 여름, 스페인 농장에서의 일주일

Avila에서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


한국에서 온 과묵한 군인

2011년, 교환학생 자격으로 헝가리에 있는 Pecs 라는 작은 도시에 반년 정도 머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저처럼 공부하러 온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이 꽤 있었고, 모두 함께 한 기숙사에 머물렀어요. 어쩌다 보니 그 중에서도 스페인 친구들과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모두 비슷한 나이에다가 술과 음악,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무엇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 패턴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말에 정오가 지나서 일어나면 꼭 비슷한 시간에 눈을 부비면서 아침을 먹으러 나오는 스페인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스페인 친구들은 저에 대해 호기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특히 한국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군 경력' 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습니다. 으쓱한 마음에 과장된 투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매일같이 훈련을 하며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실제로 총격전이 일어난다고 말이에요. (물론 거짓말) 어차피 기숙사에 한국 남자라곤 저밖에 없었기에, 마음껏 군대와 관련된 뻥을 친다 한들 들킬 리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그때 워커 신발을 잘 신고 다녔고 초반에는 영어가 서툴러서 대화도 단답식으로 하곤 했는데, 그런 점 마저 뭔가 군대 출신이라 그렇다고 생각한 스페인 친구들은 그런 저를 거의 과묵한 참전군인 정도로 봤던 거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Jorge라는 친구가 저의 경력 (?) 을 살릴 수 있는일이 있다고 하며, 학기가 끝나면 스페인에 있는 자기네 농장으로 놀러오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무심결에 알겠다고 한 저는 결국, 그 해 여름 그 친구가 사는 곳인 마드리드 근교 Avila 라는 도시에 가게 됩니다. 어차피 여름 내내 스페인에서 보낼 계획이기도 했구요.




우리는 멧돼지를 잡으러 갈거야!



Avila는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량 가면 도착하는 곳으로, 성곽으로 둘러쌓인 조용하고 예쁜 도시 입니다. Jorge네 가족은 Avila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저는 정류장에서 내리자 마자 픽업 나온 친구의 지프차를 타고 거의 납치되는 기분으로 친구네 농장으로 따라갔습니다. 스페인 특유의 지평선이 쭉 펼쳐진 아주 조용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지요.


Jorge네 가족들은 농장에서 주로 소를 길렀고, 제가 농장에 도착한 날은 마침 시장으로 소를 넘기기 위해 트럭에 실어 옮기는 일명 '소를 치는 날'이었습니다. 소들이 생각보다 너무 무섭게 생겨서 으어.. 하고 겁먹고 있는데 친구 삼촌분이랑 아버지께서 열심히 일 하시는 걸 보니 또 예의의 나라 코리아에서 온 사람으로써 가만히 있을 수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옆에서 소치는 거 같이 거들어 드렸지요. 두 분께서는 제 어깨 두드리면서 엄청 좋아해주셨습니다. 스페인어로만 말씀을 하셔서 그냥 웃으면서 고개 끄덕끄덕했지만.. 어쨌든 점수는 확실히 딴 것 같았어요. 역시 만국 공통으로 친구 부모님들은 성실한 모습을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밥을 먹으러 가니 친구와 친구 가족분들이 웃으면서 저에게 스페인어로 뭐라뭐라 하시길래, 무슨 이야기를 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알고 봤더니 Jorge가 가족분들에게 내 코리안 친구는 군 경력도 있고 굉장한 브레이브맨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했다는 거에요. 어쩐지 자꾸 엄지손가락을 드시더라니...

그리고 친구가 이은 말에 저는 깜짝 놀랍니다. "우리는 멧돼지를 잡으러 갈거야."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멧돼지 사냥? 알고 봤더니 농장에 멧돼지가 나오면 자꾸 농작물을 해치기 땜에 정부에 허가 받고 사냥을 한다는 거에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겠다나 어쨌다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가 어디선가 총을 꺼내 왔습니다. 스코프까지 달린 그럴듯한 라이플이더라구요.
또 총은 그래도 군대 시절에 진짜 쏴보긴 했으니까 겁은 안났습니만, 멧돼지라니.. 그래도 친구가 몇번 경험이 있다고 하니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기대와 달리 멧돼지는 정말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농장으로 멧돼지 탐색을 나섰는데, 기대와 달리 멧돼지는 정말 찾기 어려웠습니다. 분명 친구말처럼 농작물 해친 자국은 남아있는데, 진짜 이게 멧돼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요. 친구에게 물어보니 멧돼지들은 눈은 거의 보이지 지만 후각이랑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서 사람 냄새만 맡아도 바로 꽁무니를 뺀다는 거에요. 겁도 엄청 많아서 사람들과 마주칠  같으면 알아서 피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저렇게 도망을 다니는데 어떻게 사냥을   있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멧돼지는 겁이 많아서 항상 오는 시간에만 온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방문 시간대에 맞춰서 잠복하고 있으면 만날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저는 사실  모르니 고개만 끄덕였지요. 친구는 나름 멧돼지 경력자라서 잡은 맷돼지 이빨로 만든 트로피 같은거도 집에   있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주변 스팟을   정해서 멧돼지가 좋아하는 곡식을 군데군데 바위 밑에 묻어 놓고  바위에 "사냥용 스톱워치"  묶어 놓았어요. 만약에 멧돼지가 곡식을 먹기 위해 바위를 헤집으면 시계가 넘어지면서 멈추게 되고, 그래서 멈춘 시간대를 보고  시쯤 멧돼지가 왔었는지 알게 되는 그런 원리였던 거죠. 헝가리에서  친구는 매일 입버릇처럼 세뇨리따가 어쩌고 취해서 이상한  추고 그래서 바보인  알았는데  때는 처음으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낮에 다시 어제 스팟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진짜 한 군데에 바위가 넘어져 있고 저녁 6시쯤 시계가 멈춰 있었습니다. 올커니, 왔구나!
그래서 거기 근처에 또 곡식 묻어 놓고 오후 5시 30분부터 기다렸습니다. 혹시나 가까이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높은 바위자락에 숨어서 지켜보았지요. 한시간을 넘게 기다리다 보니 슬슬 해가 지는데, 멧돼지는 코빼기도 안 비추는게 아닌가요. 아 눈치챘구나..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허탕치고 집에 가는길에 어제 스톱워치를 설치해뒀던 다른 스팟을 잠깐 들려보니 멧돼지의 흔적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그곳에는 저녁 7시 정도에 왔더라구요. 일단 날이 늦었으니 농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맥주를 좀 마시고 내일은 멧돼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슬쩍 품으면서 잠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생에 다시 없을 만한 짜릿한 경험을 남겨준 곳이라 그런지, Avila를 떠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아쉬웠습니다.  


다음날 바로 그곳에 가서 또 곡식을 묻어둔 채 6시 부터 대기에 들어갔습니다. 영화 <프레데터>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적들의 적외선 감지기를 피하기 위해 진흙탕에서 뒹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영화처럼 냄새를 지우기 위해 저희도 흙에 한번 뒹굴고 갔어요. 진짜 사냥이 이런거구나라는 기분에 뭔가 두근두근해졌습니다. 제가 어쩌다가 한국에서 온 브레이브맨이 되어서 여기서 사냥을 다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도 나구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보니 저 멀리에서 갑자기 뭔가 슬쩍 나타났습니다. 드디어 멧돼지가 나타난 것이죠. 멧돼지는 조심스럽게 아까 저희가 먹이를 묻어놓은 장소로 다가왔어요. 친구가 낮은 소리로 코리안 솔져의 사격솜씨를 보여달라고 졸랐습니다. 내가 올해 예비군을 갔던가 라는 생각을 하며 잔뜩 긴장한 채 멧돼지 머리를 겨냥하고 쐈어요.


총알은 겨냥한 곳을 살짝 빗나가서 등줄기를 맞췄습니다. 그랬더니 멧돼지가 미친듯이 빙글빙글 뛰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확 무서워지는게, 멧돼지가 성이 나서 이쪽으로 돌진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바위 뒤에서 둘이 숨 죽이고 계속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혹시나 달려오면 전력으로 도망갈 준비를 한 채요. 한 2~3분이 지났을까? 멧돼지가 그렇게 뛰다가 갑자기 픽 쓰려졌습니다. 다가가려고 하니 친구가 아직 가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갑자기 일어나서 돌진 할수도 있다고.


한 10분 정도 지켜보다가 움직임이 없기에 조심스럽게 멧돼지에게 다가갔습니다. 가까이서 가보니 확실히 숨을 거두었더라구요. 두 명이서 낑낑 거리면서 차에 싣고 농장으로 갔습니다. 친구가 한 80kg은  되는 거 같다고 하며, 중박 이상의 성공적인 사냥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어쨋든 저는 다시 거기서 멧돼지도 한방에 잡은 용감한 코리안 솔저가 되었고, 그 멧돼지 이빨로 만든 트로피에 이름도 새겼습니다.

하지만 트로피는 결국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어요. 다음 행선지로 다른 친구가 사는 Caceres라는 도시를 방문해야 했고, 일정을 맞추기 위해선 사냥이 끝난 다음 날 바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생에 다시 없을 만한 짜릿한 경험을 남겨준 곳이라 그런지, Avila를 떠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아쉬웠어요. 지금도 친구네 아버지께선 용감한 한국 친구가 잡은 멧돼지 라며 누군가에게 트로피를 설명하고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 기회가 된다면 스페인 소도시 여행기를 계속 써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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