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ChatGPT를 쓰는 이유
여느 때처럼 의미 없는 회의를 하는 어느 날이었다. 또다시 일정으로 들들 볶이는데 대표가 내게 업무를 새로 줬다.
"A 데이터를 B 형식으로 변경하는 작업이 필요해. 내가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 금방 할 수 있는 거니까 XX 씨가 좀 해. ChatGPT 돌리면 금방이야."
실무자를 제일 열받게 하는 문장 1위를 꼽으라면 직접 업무를 하지도 않는 관리자 입에서 나오는 "그거 금방 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저 작업은 몇 주 전에 이야기가 나온 일인데, 내가 그때 이 업무에 이틀이 소요된다고 하니까 대표가 '그거 그 정도로 안 걸릴 텐데? 내가 해볼게' 하고 가져간 업무다. 그러니까 그는 그걸 몇 주간 해결을 못해놓고 시간이 없어서 못한 척을 하며 나에게 그 업무를 도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냥 솔직하게 본인이 시도했는데 잘 안 됐으니까 나보고 하라고 했으면 기분이 덜 나쁠 텐데, 일을 쥐어 주면서 '금방 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업무 난도를 깎아내리는 것이 정말 열받는다.
ChatGPT가 등장한 이후로 관리자들의 '실무 후려치기'가 더 심각한 것 같다. 어차피 ChatGPT가 하는 거 아니냐며 업무를 왕창 쥐어주고 마감 기한을 점점 줄이는 식이다. 장담하건대 이들은 실무자들이 왜 ChatGPT를 쓰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며, 본인 스스로도 AI 활용을 제대로 못해 봤을 것이다.
나는 ChatGPT 활용을 정말 잘한다. 근데 그게 "이것 대신해 줘" 하고 한 마디 툭 던져 놓고 돌아오는 답변을 그대로 갖다 쓰는 식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업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ChatGPT는 결코 완벽하지 않아서 '복사/붙여 넣기' 식의 활용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ChatGPT에게서 답을 얻더라도 그걸 검토하고 확인하며, 모르는 내용은 반대로 내가 학습하기도 한다. 가끔은 ChatGPT를 쓰면서 업무 시간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ChatGPT는 분명 단순 작업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 업무는 단순 작업이 아니다. 난 ChatGPT와 토론을 한다. "난 이걸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A를 B처럼 진행했을 때의 문제점은 뭘까?" 하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사실 이건 내가 ChatGPT와 하고 싶은 대화가 아니라, 나의 인간 동료와 선임들과 논의 하고 싶은 내용이다.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싶은데 이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나 또한 경력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회사든, 지금 회사든 업무 상의 고민을 나눌 상대가 없다. 다들 각자의 업무를 하기 바쁘고 일단 결과를 내는 것이 우선이다. 괜찮은 회사에서는 이런 고민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또한 업무다. 그런 회사들은 서비스를 더 키울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고 있다. 그러나 멀리 보기보다 당장의 벌이가 시급한 회사에서는 이런 고민이 사치다. 질문하는 게 눈치 보인다. 눈에 보이는 방법대로 코앞의 문제를 해결만 하면 그것으로 그 프로젝트는 성공한 것이다.
연차도 얼마 되지 않은 내가 회사의 프로세스에 대해 멀리 보니, 보지 않니 하고 평가하는 것이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길지 않은 경력 동안에도 나는 충분히 겪었다. 지난날에 허술하게 진행된 업무들이 미래의 더 큰 업무가 되어 돌아오는 비극들을 말이다. 지금도 나의 동료들은 진작에 끝났어야 할 지난 프로젝트의 '똥'을 치우는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고 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또한 마감 기한이 있는데 똥 치우느라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현재 프로젝트에 할당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이 프로젝트 또한 '똥'이 되어갈 것이다.
나는 최대한 '똥'을 생산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 내가 ChatGPT를 적극 활용하는 이유다. 원래는 선임에게 검토받아야 할 것을 ChatGPT에게 검토받는다. 내게는 검토를 부탁할 수 있는 선임이 없다. 예상 가능한 오류가 무엇일지도 ChatGPT와 함께 대화한다. 때로는 이 AI가 나보다, 우리 대표 보다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더 많은 걸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동료이자 사수인 ChatGPT는 너무도 유용하다. 하지만 가끔은 각자가 각자의 AI를 끼고 각자도생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이 든다. 함께 고민하지 못하고, 검토하거나 리드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우리가 같은 사무실을 공유하고 직급을 가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각자 집에서 일하고 수익을 n분의 1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직원이 자기 돈으로 결제한 AI를 자신의 부하 직원 마냥 부리려는 회사도 웃기다. 회사는 우리가 왜 ChatGPT를 쓰는지 모른다. 내 위치, 내 직급, 내 업무 모든 것에 약간의 무기력함이 드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