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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미루 Sep 04. 2023

와일드, 못이 될 바엔 망치가 되자


1줄 요약 : 주인공이 수 천 킬로미터의 PCT를 걷는 실화 기반의 치유영화. 





 먼저 이 영화를 저널의 주제를 잡은 이유는 영화가 셰릴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이 영화적으로 자연스럽고 탁월했기 때문이다. 평상시 우리가 언제 공상에 잠기고, 과거를 회상하는가 생각해보면, 샤워를 하거나 길을 걸을 때처럼 몸은 무언가 행동하지만(과한 운동 같은 것이 아니라 여유 있는 행동) 머리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생각에 잠기는 것 같다. 영화는 그런 포인트들을 정확히 잡아내어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법한 포인트에서 회상 장면으로 넘어간다. 

 회상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짧은 잠시 잠깐의 순간들로 우리가 영화에 후반부를 상상하게 만들며 흥미를 자극하고, 뒤로 영화를 진행해갈수록 퍼즐 맞추듯 한 조각씩 셰릴의 과거를 보여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녀의 상처는 무엇인지, 그녀는 얼마만큼 망가졌고, 왜 망가졌는지에 대하여. 


 [와일드]는 성장과 치유, 그리고 여행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기 때문에 스토리 전개되는 내내 주인공이 걸어가는 길들이 보는 관객의 마음을 치유해준다. 특히나 셰릴이 걸어가는 여행의 시작점은 사막인데,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고, 걸어가며 그녀 자신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의 발길이 닿는 여행지는 눈 덮인 산과 험준한 돌산을 지나 숲에 다다른다. 더군다나 숲에서 만난 아이의 노래에 셰릴은 결국 뒤돌아 눈물이 터지고, 그 별것 아닌 노래가 셰릴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나마저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리에 선 셰릴이 여행의 초반보다 훨씬 단단해졌고, 여행을 끝낸 4년 후 그녀의 미래가 다시 화창하게 발돋움할 것을 말해주며 끝난다. 이 장면도 숲이나 여타 다른 곳이 아니라 왜 다리로 꼽았나에 대해 생각해보면 다리는 다른 배경들에 비해 인간의 손이 닿은 인공적인 공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다리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자연물들 속에서 4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녀가 드디어 다시 온전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살아갈 준비를 마쳤고, 자연이 아닌 사람 사는 도시로 나가는 통로가 아니었나 해석해본다. 


 이제 주인공 셰릴 캐릭터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셰릴은 학창시절에는 엄마 바비가 원하던 대로 그녀보다 교양 있고 똑똑하게 자란 아이였으며 졸업 후 음식점의 웨이트리스로 일했어도 결혼한 남편이 있는 마냥 풍족하지도 않지만 심각하게 불우한 상황에 처하지도 않은, 그럭저럭 괜찮게 사는 여자였다. 그녀의 엄마가 죽기 전까지는. 셰릴은 갑작스럽게 엄마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으며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셰릴은 엄마를 위해 꽤 오랜 기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레이프(아들)를 병원에 데려갔다. 기뻐할 엄마를 생각하며 한껏 기대에 부푼 채. 셰릴은 죽음을 앞둔 절망적인 상황의 엄마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것이고, 그를 통해 자신마저 절망적인 그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행복해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런 셰릴이 마주한 건 좀 전에 기증을 위해 안구를 적출하고 눈에 얼음을 댄 채 시체처럼 누워있는 엄마였다. 셰릴은 절규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엄마를 껴안고,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정말 지독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주기 위해 누군가를 데려갔는데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황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다니. 안구가 적출되어 붉게 눈꺼풀만 남아있는 바비는 이미 그 자체로 시체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눈이 없는 엄마의 모습은 미리 알고 마주했어도 충격이 컸을 텐데, 많이 잡아야 이십 대 중반일 셰릴에게 그 순간과 상황은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을까. 시한부를 선고받은 엄마는 평생을 아내가 아니면 엄마로 살았다고 울부짖었고, 좋은 딸로 남기 위해 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일 년은 살 거라던 엄마는 한 달 만에 지나치게 악화되었고, 늙으면 편히 보내달라 했던 엄마가 아끼던 말은 가난 때문에 장총으로 쏴 죽였다. 상황은 셰릴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기에 충분했다. 나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바비의 말(horse)과 바비가 동일시되어 보였다. 늙고 병든 가여운 말과 늙고 병든 가여운 엄마. 셰릴은 무엇 하나 지키지도, 편히 보내주지도 못했다. 어쩌면 셰릴을 엄마의 죽음 이후 그녀를 미치게 만든 건 죄책감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셰릴은 이 모든 고통 앞에서 무너지기로 했다. 그녀는 헤로인을 하고, 남편과 함께 사는 집을 나갔으며, 눈에 띄는 아무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자신의 엄마인 바비에게 왜 주정뱅이와 결혼해서 빈곤한 생활을 하느냐고 몰아세웠던 과거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셰릴의 행동은 자신의 자랑이자 작은 세계의 중심이었던 엄마의 인생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만든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다. 둘은 모두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폭언을 퍼붓고, 정신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었으므로. 시간당 10달러짜리 상담사는 그녀에게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지만 정작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고 말하고 셰릴은 그가 잘못 봤다고 답한다. 그녀는 헤로인을 하고 아무 남자와 잘 때면 행복해지고, 그렇지 않을 때는 꼭 죽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셰릴은 영화에서 지나가는 말로 마약을 코로 들이마시기는 해도 주사까지 맞을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녀의 지독한 방황의 시작이 벼랑 끝에 내몰린 그녀가 그저 숨 쉴 구멍 하나를 찾았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셰릴은 자꾸만 죽고 싶어져서, 살고 싶다는 의지에 눈을 돌린 것이다. 꼭 행복해야만 사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고 지내면 잠깐은 사는 듯하여 셰릴은 그걸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믿은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가 가여워 견딜 수 없었다. 


 이제 셰릴의 엄마인 바비 캐릭터에 대해 살펴보자면 바비는 평생을 주정뱅이의 아내로, 셰릴과 레이프의 엄마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녀는 셰릴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다시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셰릴과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셰릴은 그녀의 행동이 용기 있는 일임을 알지만 선뜻 학교에서 아는 척하지 못한다. 바비는 그렇게 언젠가부터 어긋나온 자신의 인생을 바로잡아보려 했다. 바비는 자신의 좋은 면을 보며 살아야 한다고 셰릴을 가르쳤지만 죽음의 앞에서 무너졌다. 자신의 지난 평생 동안 온전히 자신으로 살아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윗부분에서 셰릴의 여행은 바비가 학교에 다시 들어간 것과 비슷하다. 그녀들은 어긋난 삶을 바로잡기 위해 용감한 선택을 했고, 바비는 판타지 속의 여우로 셰릴의 앞에 등장하며 그녀와 닮은 자신의 딸을 지켜본다. 셰릴이 목적지에 거의 다 다다르자 그럼 그걸로 되었다는 듯 미련 없이 뒤돌아 사라지는 여우는 더더욱 엄마를 떠오르게 한다. 나는 여우의 등장을 통해 마치 그녀의 딸 셰릴이 정신과 신체를 갉아먹는 고된 여행 중 행여 잘못되지는 않을까 바비가 계속 지켜봐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자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용감한 도전을 셰릴은 잘 매듭짓기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못이 될 바엔 망치가 되자.”던 셰릴의 말을 응원하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상황은 마음을 못나게 만들고, 마음이 못나면 행동마저 못나진다. 상황은 셰릴을 못처럼 뾰족하게 만들었으나, 여행을 시작한 그녀는 그게 좋은 답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셰릴은 망치가 되기로 했다. 길이 없다면 제 길을 새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망치가 되기로. 나 또한 그녀의 말을 되새기며 기꺼이 망치가 될 용기를 얻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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