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34
Barkly Homestead, Northern Territory
Australia
"우리는 보호 따위 없는 사랑을 나누고 있지! (We are making love without protection!)"
모든 게 바짝 마른 아웃백의 여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물기가 있는 곳을 찾아 우리 숙소로 몰려든 수백수천 마리의 바퀴벌레가 드글드글 끓던 밤에, 우리는 트리를 꾸몄다.
바퀴벌레가 바닥에도 벽에도 천장에도, 그야말로 눈이 닿는 곳엔 어디에나 있어서 바퀴벌레라면 질색팔색 하던 나조차도 좀 무뎌졌던 것 같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았던 게 신기할 만큼 많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돌다리를 두들겨보듯 조심히 발이 닿을 곳을 먼저 툭툭 차는 습관이 붙었다. 툭툭 찰 때마다 작은 파도가 치듯 바퀴벌레 떼가 우르륵 물러났다. 바퀴벌레의 바다를 가르는 모세가 된 기분은 썩 전능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바퀴벌레만이 뿐만이 아니었다. 가끔은 신이 저주를 내린 듯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가 휘몰아치다 떠난 적도 있었다. 더운 여름밤에 에어컨을 틀고 한참 달게 자다가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거대한 여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외형은 비슷했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 다음날 바로 주방에서 양파망을 가져다가 에어컨 구멍을 막아버렸다. 물론 그 이후에도 머리끝까지 시트를 덮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런 여름이었다. 모두가 바퀴벌레에 지긋지긋하게 익숙해질 수밖에 없던 여름. 온갖 벌레가 휘몰아치고 슬리퍼 위로 드러난 맨발을 노리는 작은 전갈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며칠 동안 타던 들불이 마침내 길 건너에 도착해 넘실대고 델 듯 뜨거운 햇살에 빨래가 반나절도 안돼서 쫙쫙 마르던 아웃백의 여름.
"우리는 보호 따위 없는 사랑을 나누고 있지!“
그런 여름이었다. 리자가 보호 따위 필요 없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던 때가.
운 좋게도 새벽 5시부터 출근해야 하는 모닝쿡이 되었는데 아침잠이 많아 늘 10분 전에야 겨우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3분 거리의 일터로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로드하우스에 들어가 시리얼을 하나 까먹고 주방에서 야채를 다듬다 보면 찬란한 해가 떠올랐다. 아침 햇살조차도 닿는 모든 걸 뜨겁게 달궈야 직성이 풀리는지 해가 뜨고 나면 모든 건 촉촉함을 잃었다.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건식 사우나가 된 것 같았다.
오후 일찍 일이 끝나면 다른 친구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혼자 누들을 끼고 작은 모텔 손님용 수영장에서 수영 연습을 하거나, 구름이 좀 낀 날이면 나무 사이에 해먹을 걸어놓고 노래를 들으며 구름이 흐르는 걸 보면서 멍을 때리거나. 그러다 보면 친구들이 하나씩 자기 쉬프트를 마치고 돌아와서 합류했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까지 댐에서 맥주를 마시며 수영을 하다가 몸을 말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노을이 졌다.
일하는 시간이 가장 비슷했던 리자와는 일할 때와 놀 때 거의 붙어 있었다. 같이 수다를 떨고 산책을 다니고 농담을 하고 수영을 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노을을 보며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사랑에 빠졌고, 혼자 멍 때리는 시간은 여름 해만큼이나 더 길어졌다.
브래드의 차는 문고리에 걸린 양말이나 넥타이 구실을 했다. 그의 차가 주차된 걸 보면, ‘오늘은 리자가 오후에 데이트를 나가겠군’이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브래드는 리자를 태우고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하거나 근처에 유명하다는 관광명소에 데려갔다. 아웃백에서 소를 모는 일을 했던 (정말 영화 <오스트레일리아>에나 나올 법한 설정이지만, 설정이 아니다) 브래드는 멋들어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도 타고 채찍도 휘둘렀다. 언젠가 한 번은 우리 숙소에 와서 아주 긴 채찍을 휘두르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소리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총을 맞은 듯 몸이 움찔거렸다. 리자가 용감하게 채찍 휘두르기에 도전했지만 물렁한 뱀처럼 앞으로 꾸부러져 기어가던 채찍은 그다지 놀랄만한 소리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브래드는 굉장히 남자다운 남자이기도 했다. 언젠가 한쪽 팔이 푸르뎅뎅하게 부어서 온 적이 있었는데, 리자가 팔이 왜 그러냐고 묻자 브래드는 태연하게 팔이 부러졌다고 했다. 리자가 깜짝 놀라서 얼른 병원에 가라고 다그치자, 브래드는 여전히 매우 태연한 자세로 팔 좀 부러진 걸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고집을 부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리자는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고통에 약한 외지인의 가슴에는 그저 존경심이 퐁퐁 솟을 뿐이었다. 그는 진정한 아웃백의 카우보이구나.
한 번은 밤에 슬리퍼를 신고 숙소로 같이 걸어가다가 내 발 바로 옆에 꼬리를 치켜든 전갈을 보고 나를 휙 뒤로 당기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조심해야 돼, 전갈은. 죽진 않겠지만 꽤 아프다고.”
전갈에 찔리면 당연히 죽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알았나. 하지만 진정한 아웃백의 카우보이 브래드가 “꽤 아프다“고 말한 거라면, 아마 난 병원에 닿기 전에 죽고 말겠지.
워킹홀리데이로 이곳에 온 전 세계 일꾼들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을 보내고 떠났다. 내가 떠날 날도, 리자가 떠날 날도, 제스가 떠날 날도 언젠가는 올 일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그날이 훨씬 가까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2년이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론 나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사람도, 이 사람과 함께 떠나면 어떻게 될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저 우리가 가는 길이 우연히 겹쳤을 뿐이라고, 함께 떠나면 우리는 분명 불행할 거라고 스스로 마음을 여미고 돌아섰다.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리자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걸까. 나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오늘의 뜨거운 사랑이, 행복한 마음이, 함께한 시간이, 언젠가 가슴 아픈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몸이든 마음이든, 보호가 없는 사랑을 하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내 일도 아닌데 한없이 행복한 리자 옆에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모든 걸 다 태울 듯이 바람을 타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들불처럼, 리자는 용감하게 사랑을 향해 달려갔다. 늘 감정 앞에 겁부터 내던 나와는 달랐다.
크리스마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행복한 둘을 보면서 그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커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