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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Oct 02. 2022

아벨태즈먼에 두고 온 것

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35


아벨태즈먼에 두고 온 것

Abel Tasman Coast Track

New Zealand



비스듬하게 뒤집어진 부츠 같은 뉴질랜드 지도를 보면 발목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똑 떨어져 있는데, 발부분은 북섬이고 발목 윗부분은 남섬이다. 북섬의 끝단에 뉴질랜드의 수도인 웰링턴이 톡 튀어나와 있고, 그 맞은편 남섬에는 웰링턴에서 출발한 페리가 도착하는 픽턴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픽턴에서 왼쪽 위 대각선을 보면 아벨태즈먼 국립공원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힌 짙은 초록색의 동그란 지역이 보일 것이다.


거기서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지도를 확대해보면(나는 당신이 분명 종이 지도가 아닌 구글 지도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98% 확신한다), 파란 바다와 초록색의 국립공원 사이에 점점이 이어진 길이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날 것이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나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아벨태즈먼 코스트 트랙의 일부를 1박 2일 동안 걷기로 했다. 11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샤워장도 없는 길을.



아침에 급하게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워터 택시 사무실로 향했다. 아벨태즈먼 코스트 트랙은 전체 51km로 완주하려면 5일 정도가 소요된다. 우리는 그 구간 중에서 해안가에 이어진 아와로아 Awaroa 에서 앵커리지 Anchorage 사이의 23.5km만 걷기로 했다. 우리는 도착점에서 워터 택시를 타고 시작점으로 가서 출발하기로 했다. 코스 자체가 편도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출발지로 데려다주면서, 우리가 밤을 보낼 캠프장에 텐트를 던져주는 서비스도 같이 하고 있었다. 이 더운 날에 텐트까지 이고 지고 갈 자신이 없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작은 배를 타고 한참을 거슬러 올라갔다. 중간에 처음으로 헤엄치는 펭귄과 물속에서 빙글빙글 돌며 노는 물개들을 만났다. 자유롭게 사는 야생동물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동물원에 갇혀 무료하게 낮잠을 자거나 사람들의 소음에 스트레스 섞인 동작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헤엄치고 싶으면 치고 떠다니고 싶으면 떠다니고 바위 위에 올라가서 일광욕을 하고 싶으면 하고. 물속에서 자유롭게 핑구르르 돌고 있던 물개는 그저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중인데, 그걸 본 나만 괜히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너무 좋았다. 어떤 존재의 지극히도 평범한 하루를 잠시 숨죽여 지켜볼 수 있어서.



우리의 출발지인 아와로아에서 작은 배는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남기고 곧 떠났다. 이 눈부신 해변에 오로지 우리 셋 뿐이구나.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 — 7시간 동안 열심히 걸어서 텐트가 기다리고 있을 캠핑장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 한낮의 공기는 뜨듯했고, 우리는 바닷물에 젖은 발을 대충 말리고 양말을 신고 의기양양하게 신발을 신었다. 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없이 걷다가 곧 하나가 우중충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가는 친구들의 뒤통수를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댔다. 하나의 노래가 끝나자, 이어서 다른 하나가 조금 더 신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를 찍고 바다를 찍고 바위 위에서 일광욕하는 펭귄을 찍었다. 길은 명확했고 표지판은 적절한 곳에 있었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았고 태양은 계속 밝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도 조금씩 생겨났다. 우리는 계획대로 캠핑장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분명 그럴 거야.



한참 동안 또 말없이 길을 걸으면서 자꾸만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 두고 온 것이 있는 사람처럼. 뭘 두고 왔는지, 아니 그전에 두고 온 게 과연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지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아까 샌드위치를 먹으며 쉬던 곳에 카메라를 두고 왔나? 그럼 지금 내 손에서 저 녀석들 뒤통수를 찍고 있는 이 물건은 뭐란 말인가. 물통이라도 두고 왔을까? 다 먹은 샌드위치 봉지라도 흘리고 왔을까?


무얼 두고 왔을까. 아무것도 두고 온 것이 없다면,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일까. 오르락과 내리막을 미친 듯이 오가는 길을 헉헉대며 따라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바크 만 Bark Bay 에 도착해서 파도소리 들리는 백사장에 셋이 나란히 누워 꿀맛 같은 낮잠을 잤다. 나도 짧게 잠에 빠졌다가 금방 깨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허전함이 다시 스며들었고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계속 찍었다. 한 시간쯤 재우고 친구들을 깨워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다와 닿은 강을 지나가는 길이었고 우리는 길고 멋진 구름다리를 건넜다. 하루 종일 열심히 걸었지만 중간에 낮잠이 문제였을까. 토렌트 만 Torrent Bay 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앵커리지로 가는 지름길이 밀물에 막혔다. 어흑.


30분이면 도착할 길을 지친 발을 끌고 1시간 30분을 돌아 돌아 도착했다. 마지막 해변가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걸었다. 발가락 사이로 밀려드는 모래의 기분 좋은 감촉과 함께 캠프장에 도착했다. 캠프장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텐트를 쳤다. 챙겨 온 식빵과 참치캔을 따서 샌드위치라기보다는 빵 사이에 참치를 대충 바른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다. 뭘 먹든 음식은 아무래도 좋았다. 땀에 절여진 상태로 샤워를 못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 어때. 아무렴 어때!



아벨태즈만에서 시간상으로도 공간상으로도 멀리멀리 떨어진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웠을 때 다시 그 허전한 느낌이 찾아왔다. 길을 걷는 내내 두리번거리게 만들었던 그 느낌. 나는 무얼 두고 왔을까. 내가 걸었던 그 길들을 다시 되짚어보고 마음속에서 다시 걸어보며 생각해봐도 잃어버린 건 없었다. 어두운 방 안에 누워 나는 그 찬란한 햇살이 내리쬐던 백사장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숨을 헐떡이게 만들었던 오르막과 내리막을, 푸르게 넘실대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을,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해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길에서 나는 영원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도 없는 길을 계속 걷다 보니 무얼 두고 왔는지 알게 되었다. 한 군데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내가, 1박 2일 동안 숲길을 걸었다. 백사장을 걸었다. 구름다리를 건너고 강을 가로질렀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이 참치캔과 식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파도 소리로 가득한 모래밭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이 들었다. 원래의 나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다시 내가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가루를 남긴 남매처럼 점점이 그 길에 원래의 나를 조금씩 두고 왔나 보다.



변화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 같지만, 변화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동안 변화의 징조들에 무관심했던 탓이 크다.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그저 서서히, 밀려오는 풍경에 나를 맡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원래의 나를 뒤로 하고 그 풍경 속에 서있게 된다. 달리는 차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갑자기 깨서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 사람처럼, 하루아침에 듣도 보도 못한 곳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군다. 원래의 나는 어디에 있고, 나는 지금 여기에 어떻게 있는 거냐고 묻는다. 답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리는 차에 몸을 실은 나 조차도 답을 줄 수가 없다. 깨어남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온다. 그러니 내가 두고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혹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는 걸었고,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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