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떠나 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40
Milford Sound
New Zealand
여행 17일째. 그중 절반 이상을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잠을 잤다.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쌀쌀했다. 밤이 되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기절하듯 잠들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잠을 잔 건 맞나 싶게 피곤했다. 날씨는 계속 오락가락했고 낮에는 따뜻해도 밤에는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침대가 그리웠지만 퀸스타운의 비싼 물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텐트 사이트를 찾았다. 특별히 좋은 곳도 아닌데 다른 데보다 3불이나 더 비싸서 이를 갈면서 텐트를 쳤다.
다음 날에 다 같이 퀸스타운 앞에 있는 호수에서 카약을 타기로 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실패했다. 비싼 돈을 주고 배를 빌려서, 그 무거운 걸 들고 낑낑대며 호수까지 가져가서, 물 위에 띄워놓고 올라타서 노를 열심히 저었지만 계속 제자리였다. 앞으로 나가지 못할 정도로 호수에서 파도가 밀려와서 결국 주인에게 카약을 반납했다. 아쉬운 대로 물놀이라도 할까 했는데 호수의 물은 아직 너무 찼다.
할 일이 없으니 그나마 따뜻한 곳을 찾아 옷을 말리면서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알아볼 수밖에. 그러다 운 좋게도 밀포드 사운드에 하나뿐인 롯지에 방을 구했다. 가격은 꽤 비쌌지만 거기가 아니면 잘 곳이 없으니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다시 뽀송뽀송하고 푹신푹신한 침대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다음 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퀸스타운을 떠나 테 아나우 Te Anau 를 경유해서 밀포드 사운드 Milford Sound 에 도착했다.
세계지리 시간에나 들어본 피오르드 지형으로 유명한 밀포드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건 대략 두 가지 정도였다. 3박 4일 동안 하이킹을 하거나, 크루즈 배를 타고 밀포드 사운드를 구경하는 것 — 선택은 여행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고, 이미 두 번의 하이킹과 텐트 노숙생활에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믿음직한 배에 올라 밀포드 사운드의 아름다운 경관이 그대로 비친 호수를 한량처럼 즐기는 것! 아무렴! 그런 희망도 없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겠어! 직선거리로는 70km 남짓 되는 길을 꼬부랑꼬부랑 287km나 돌아왔는데!
잔잔한 물 위로 배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그림 같은 봉우리와 폭포가 물 위에 그대로 비친 절경을 기대했다. 그런 기대를 가질만했다. 크루즈 회사들이 걸어놓은 사진을 보면 그런 기대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똑같은 크루즈 배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후 크루즈보다 오전 크루즈가 가격이 더 저렴해서, 우리는 ‘럭키!’를 외치며 오전 크루즈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우리가 마주한 밀포드 사운드는 이런 풍경이었다.
폭포의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도로 하늘로 솟아오르는 풍경이라니. 잔잔하고 아름다운 밀포드 사운드는 말도 없이 어디로 가버린 거지.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뺨을 맞으며 밖으로 몇 분 나갔다가 흠뻑 젖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물이 거꾸로 솟는 게 웃기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밖으로 나갔지만, 나갈 때마다 젖어서 선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거친 파도에 울렁거리는 선실도 눅눅하긴 마찬가지였다. 크루즈에 탄 다른 사람들은 이런 날씨를 예상이라도 한 듯 우비을 챙겨 입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형형색색의 우비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실 안은 점점 더 습습해졌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애틋하고 특별하지만, 경험하는 당시에는 조금은 속상하고 약간은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이 크루즈가 꼭 그랬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특별할 수가 없다. 다들 똑같이 판에 박힌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는 회오리가 치고 폭포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잔뜩 심술 난 밀포드 사운드의 면모를 보았다. 그저 그런 관광지가 아니라 물로 뺨을 맞았던 평생 기억에 남을 곳이 되었다. 와우.
우리의 밀포드는 영원히 그렇게 남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서 아주 친절하고 우아한 밀포드 사운드를 만나게 되면, 우리 기억 속의 심술쟁이를 밀어낼 수 있게 되겠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 혹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겠지.